의향의 고장 고창, 왜적 침입땐 똘똘 뭉쳐 결사 항전
의향의 고장 고창, 왜적 침입땐 똘똘 뭉쳐 결사 항전
  • 신영규 수필가
  • 승인 2020.10.29 16: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로 되짚는 전북 구국혼2 (14)고창
맛, 멋, 풍류, 인물, 역사의 고장, 문화예술 발달

 고인돌, 청보리밭 축제, 씨 없는 수박, 복분자, 풍천장어, 구시포 해수욕장, 미당시문학관, 고창읍성, 선운산, 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 판소리의 수도,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의 공통점은? 고창군이다. 따라서 고창은 맛과, 멋, 풍류, 인물, 의향의 고장이자,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고장이다.

■거석문화의 보고 고인돌

고창은 전북의 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동북쪽은 정읍시, 부안군, 동남쪽은 전남 장성군과 영광군에 인접하고 서쪽은 황해, 북쪽은 줄포만을 사이에 두고 부안군과 접하고 있으며 구릉지가 넓고 충적지가 좁은 게 특징이다.

담장 위로 솟아오른 키다리 해바라기가 소년 같은 얼굴로 벙글거리는 8월 중순, 고창으로 여행을 떠났다. 한여름의 뙤약볕이 차창 너머로 은전처럼 찰랑이며 부서지고, 여름은 그 오만한 얼굴로 열기를 더하고 있었다.

맨 먼저 찾은 곳은 고인돌공원. 코로나19로 인해 고인돌 박물관은 굳게 닫혀 있었고, 관람 열차도 멎었다. 할 수 없이 1킬로를 도보로 이동했다. 숲에서는 매미 소리가 뜨악하다. 소나무 숲과 야트막한 언덕에 크고 작은 수백 개의 고인돌이 세월의 무게를 받들고 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고인돌을 살펴봤다. 고인돌 하나하나에 족장들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고창 고인돌은 모두 447기로 제1코스에서 제6코스까지 고루 분포하고 있으며, 청동기 문화를 꽃피웠던 우리의 고대문화를 밝히는 유력한 증거물이다.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이처럼 고창은 문명사적으로 고인돌 시대에 한반도 중심이었지만, 마한시대에도 동아시아의 문물교류 중심이자 한반도 문명 수도였다.

■고창의 독립운동사

고인돌공원을 둘러본 뒤 고창 새마을공원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한국 유림 파리장서 기념비’가 있다. 파리 장서(長書)는 일제의 한국 주권 찬탈을 폭로하고 한국의 모든 계층이 독립을 열망하고 있음을 국내외에 알렸던 서한이다. 기념비에는 유림 137명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주창한 청원서 취지문과 청원서에 서명한 고창 출신의 고석진, 고예진, 고순진, 고제만, 정읍 출신 김양수 지사를 추모하는 내용 등이 새겨져 있다. 이 외에도 공원에는 근촌 백관수 선생의 동상과 한말의사 박도경 추모비가 있다.

고창은 항일운동이 터이자 독립투사의 의기가 넘치는 곳이다. 동북부에 위치한 흥덕면은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삽혈동맹으로 의병소를 설치하고 활동을 시작한 역사적인 터이다. 독립운동은 무장 성격을 띤 적극적인 항일운동 세력과 3·1만세운동에 앞장 선 독립운동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시기 대표적인 독립 운동가는 유장렬 선생이다. 그는 의병장 이석용 휘하의 부장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비밀 결사인 독립의군부에 가입하고 광복단을 조직하여 활약했다.

고창의 독립운동사에서 3.1운동사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고창현에서는 김승옥, 오동균, 김창규의 주도로 모양성에서, 무장현에서는 김영완, 김용표, 김두남의 주도로 무장장터에서, 흥덕현에서는 이종주, 이대성, 유판술의 주도로 성내면 소재지에서 만세운동이 이뤄졌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당시 고종의 밀명으로 지하 독립운동 비밀조직인 대한독립의금부가 만들어진다. 이때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의금부장으로 추대되고, 그의 수제자였던 고창출신 고석진이 총참모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했다. 또 고창 출신으로 의병활동을 했던 최전구는 대한독립의금부 순찰사(지금의 순회대사)로서 각 나라 대표들을 만나며 대외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의병투쟁으로 나라 지킨 장흥 고씨 집안

고순진은 고창군 신림면 송암리 출신이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동생 고예진에게 격문 2백여 매를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케 하였으며, 면암의진(勉菴義陣)에 조총을 제공하고 군자금을 내기도 하였다. 고예진은 그의 형 고석진 고용진과 함께 활약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태인 무성서원에서 태인 유림인사들을 규합하고 함께 거의하였다. 특히 고예진은 면암 휘하에서 정읍, 순창, 곡성 등지를 돌며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순창 귀암사에서 포진하고 적과 접전 끝에 체포되어 전주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성씨별로 보면 고창에서 독립운동을 제일 많이 한 집안은 장흥 고씨, 광산 김씨, 진주 정씨, 고흥 유씨 등의 순이다. 이중 장흥 고씨는 60여명의 독립유공자 중에 10여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올 정도로 독립운동에 많이 참여했던 집안이다.

■한말의사 박도경 왜놈 손에 죽느니 자결

박도경은 1874년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호남창의대장 기삼연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제는 내가 죽을 자리를 얻었도다”하고 동지를 모으고 무기를 수집하여 적과의 접전에서 왜적 수명을 살상했다. 박도경은 무장 법성포 장성 등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고 영광에서는 포사대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적의 포위망이 좁혀져 자신의 은신처가 노출되자 결국 일경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수많은 고초를 받았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왜놈의 손에 죽는 것보다 자결하는 것이 옳다고 결심하고 37세로 대구 감옥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근촌 백관수는 고창군 성내면 생근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7년 봄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대학 법과에 입학한 후 그곳에서 독립운동 대책위원으로 뽑혀 역사적인 2.8선언으로 일본경찰에 연행되어 1년동안의 옥고를 치루었으며, 이 선언은 바로 3.1운동을 촉진 시킴으로 독립운동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1920년 3월 출옥한 그는 귀국해서 기독교 청년회와 관련하는 한편, 언론계에 투신하여 이상재와 더불어 조선일보의 이사와 영업·편집 등을 맡아 4년간 근무하였다.

 고창은 고려·조선시대에 벼슬을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들은 ‘불사이군’의 충절의식으로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생활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선비정신을 지켜갔다. 또한 자주의식과 주체성이 강하여 위기 앞에서는 강한 응집력으로 민족정신을 드높였다. 특히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사건 때에는 고창의 저력과 기질을 유감이 발휘했다. 이렇게 고창에는 많은 의인·열사들이 있었기에 의향의 고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문화예술의 고장

고창 판소리 박물관을 찾았다. 그러나 이곳 역시 코로나 19로 인해 문이 닫혀 있었다. 시야에 들어온 고창읍성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옆에 국악의 개척자 신재효 고택으로 들어가 집안을 둘러봤다.

고창은 우리나라 판소리의 첫 수도다. 한국의 세익스피어인 신재효가 있기 때문이다. 신재효는 판소리 여섯 마당을 개작 정리하여 당시와 후대 창자들이 교범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고창에는 읍성이 있다. 이 성은 조선 단종 원년에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축성되었다. 오늘날까지 이 읍성을 지켜온 고창 사람들은 음력 9월 9일 중앙절에 답성(성벽 밟기)놀이를 재현하며 정착의 평화가 지속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신영규 수필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