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밤에 흩어져버린 정암의 개혁 시간표를 생각한다
야밤에 흩어져버린 정암의 개혁 시간표를 생각한다
  • 송일섭 염우구박네이버블로거
  • 승인 2020.10.29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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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서른넷에 종이 만드는 관청, 즉, 조지서(造紙署)의 종6품의 벼슬아치로 발탁된 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오늘의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대사헌이 되었다. 그는 조선의 중종 임금과 마주 앉아 시대를 고심했던 사림(士林)의 지도자이면서, 조선을 바꾸고 싶었던 개혁가, 그리고 올곧은 신념으로 끝없는 변화를 갈망했던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누구일까요? 뽕나무 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가 새겨졌다는 야사가 전해오는 정암 조광조다. 그는 조선을 개혁하려다가 1519년 기묘사화 때 전라도 능성(능주)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후세의 사람들은 그가 ‘조금만 덜 과격했더라면’, 또는 ‘그의 학문이 더 완전해진 다음에 출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기도 했다.

 그는 연산군을 폐위시킨 신하들이 옹립한 중종 임금의 소망을 대변하였다. 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원종, 성희안, 윤순정은 중종을 자기들 뜻대로 조정을 장악했다. 약 1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반정 실세들이 하나둘 세상을 뜨게 되면서 중종은 비로소 자기만의 새로운 정치를 상상했다. 그때 만난 사람이 ‘미치광이’로 불릴 만큼 오로지 학업에만 전념했던 조광조였다.

 중종의 조광조 발탁으로 조선은 개혁의 물꼬가 열렸다. 그가 사헌부 감찰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구습과 관행에 젖어 있는 상관들이 사헌부를 지키고 있는 한, 어떤 개혁도 할 수 없다며 상관들을 교체해 달라고 요구했다. 중종은 당황했지만,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목표 아래 중종은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4년 남짓 짧은 시간이었지만 끊임없이 개혁이 진행되었다. 백성을 대상으로 하여 고리대금업을 하는 왕실의 내수전을 혁파하고 왕실의 불교식 제사를 폐지했다. 또한, 태조 때부터 왕실에 두고 미신을 섬겼던 소격서를 혁파했다. 유능한 인재를 뽑기 위하여 ‘현령과’를 설치하고, 중종반정 때 공적을 거짓으로 꾸미거나 부풀리기를 하여 공신이 된 사람들을 몰아내기로 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중종이 힘을 보태주었지만, 그때마다 왕실과 기성세력의 반발은 매우 컸다. 특히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고자 할 때는 중종은 여러 번 ‘불가(不可)하다’라며 거절했다. 그러나 조광조는 상소를 계속하기도 하고, 경복궁 근정전에서 야간 시위까지 하면서 임금의 결단을 통촉하였다. 반정 공신들의 위훈 삭제(가짜 공적을 없애는 일)는 더 어려웠다. 조정에 큰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평정한 대가로 책봉한 공신들은 매번 약 40~50명씩이었는데, 중종반정 때는 무려 117명이나 되었다. 그중 76명은 거짓 또는 부풀리기로 공신이 된 사람들로 국가재정을 축내고 있었다. 당연히 삭제해야 해야 했지만, 임금은 그들의 집단적 반발을 두려워하며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강개와 결기 앞에서 1519년 11월 11일 위훈 삭제는 받아들여졌다.

 그런 소란이 일어난 며칠 후다. 1519년 11월 15일, 밤 9시에서 11시 사이에 조광조는 의금부에 갇히고 말았다. 그의 죄목은‘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게 했다’는 ‘붕비(朋比)’였다. 이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한때 임금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정국 현안을 고민했던 그는 망연자실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임금에게 직접 국문을 받고 싶다고 했지만, 그것을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의 간청으로 목숨은 부지한 채 전라도 능성(능주)로 유배되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사약을 받고 죽어야 했다.

 중종은 그렇게 신뢰하고 힘을 실어주었던 조광조를 왜 버렸을까. 매번 개혁 앞에서 부딪히게 되는 대립과 갈등으로 심신이 피곤했을 것이다. 개혁은 이렇듯 뼈를 깎고 창자를 끊어내는 아픔을 겪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그쳐 버린 조광조의 개혁 시간표 앞에서 아쉬움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개혁이 계속되었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 가정이 있을까마는 이후 펼쳐지는 조선의 역사는 훨씬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여전히 ‘개혁’은 우리 사회의 묵직한 화두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혁을 이야기했지만 쉽지 않았다. 미래를 보는 혜안은 없고 당장 정파적 이해에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광조를 몰아낸 중종과 구세력이 그랬다. 그러니 개혁을 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고, 또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조광조의 경우처럼 절대적으로 지지해 주는 세력이 있어야 하고 그 사회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처럼 개혁하기에 좋은 기회가 없다. 앞선 정권의 적폐와 낡은 관행에서 제기된 개혁이 필요성, 그리고 개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근세조선이 맥없이 무너진 이유는 간단하다. 조광조의 개혁이 좌절되면서 조정에는 공리공론만 무성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내다보는 안목이 없고, 낡은 당파싸움과 세도정치만 있었다. 최근 국회의 국정감사장에는 조선의 당파싸움 같은 말장난들만 가득했다.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법률과 제도를 바꾸는, 실질적인 개혁정치를 가지고 각 정파가 경쟁했으면 좋겠다.

 송일섭 염우구박네이버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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