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를 이끈 영웅 이건희(李健熙) 삼성회장의 영전에
한국경제를 이끈 영웅 이건희(李健熙) 삼성회장의 영전에
  • 김종하 국민행동본부 자문위원
  • 승인 2020.10.27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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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말(25일) 이건희 삼성회장이 78세로 세별영면(歲別永眠)하였다.

 이건희 회장은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쓸어져 의식을 잃었고 그로인해 서울 삼성병원에 입원 6년5개원 만에 세거(歲去)하였다.

  이 회장은 1942년 삼성그룹 창업주인 선친 이병철회장의 3남5녀 중 3남으로 태어났으며, 1987년에 선대회장에 이어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라 약 26년여 그룹을 이끌어 경영해 오면서 과감한 투자와 기업혁신으로 삼성전자를 세계 1위의 전자회사로 이끌어 마침내 1992년에는 반도체 D램을 개발하여 세계점유율 1위와 2006년에는 평판TV, 2011년 스마트폰 등을 잇 따라 1위 자리를 점유했고, 현재 삼성의 글로벌(Global) 1위의 제품은 20여개에 달하고 있다.

  이 회장은 지난 삼성전자를 경영하면서 국제적으로 변방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기업이 글로벌 1위의 기업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고 마침내 현실화한 세계적인 혁신적 기업경영인이었다.

  그는 2세 경영자로서 선친의 창업보다 더 어렵다는 경영방침을 뛰어넘어 제2의 창업을 성공리에 이뤄냈다는데 국제기업경영인으로부터 큰 평가를 받았다.

  고 이건희 회장이 생전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서 행한 연설에서 삼성전자 임원들에게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 다 바꾸라”는 새로운 경영방침 선언이 가장 대표적인 사건의 하나라고 전해지고 있다. 1987년 이 회장이 취임당시의 삼성매출은 10조원이었는데, 2018년에는 387조원으로 영업이익도 2000억에서 72조원으로 증가하여 시가총액도 1조원에서 396조원으로 급성장했다.

  또한 그는 ‘은둔의 승부사’였다. 그 덕분에 대한민국은 반도체, 가전 등의 분야에서 실력으로 일본의 전자산업을 눌러 진정한 ‘극일(克日)’의 통쾌함의 맛을 만끽 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진출을 결단한 것은 고 이병철 창업주였지만, 그에 앞서 이건희 회장은 누구도 반도체의 중요성에 주목하지 못했던 1974년 반도체 산업을 선친 이병철 선대회장에게 건의해서 초석을 놓았다고 한다.

  삼성전자 총수로서 경영권을 쥔 후에는 보다 과감하고 공격적인 투자로 일본과 미국의 업체를 따돌리고 반도체의 독주 체제를 굳혔고, 결국 17년간 글로벌 초일류에 삼성전자가 반도체, 핸드폰, TV사업을 세계 1위로 성장시켜 삼성전자를 ‘애플’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스마트 강자에 올랐다.

  이 회장의 어록 중에 “한명의 천재가 20만 명을 먹여 살린다”며 ‘인재경영’을 강조 했고, 1995년에는 학력제한을 폐지한 대기업 공채를 국내 처음으로 도입 실시했다. 뿐만 아니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서 2018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큰 공헌했고, 삼성그룹이 글로벌 첨단기업으로서 성장발전 하여 오늘날 한국경제가 세계 10위권으로 도약하는데 큰 공훈이 있었기에 그를 한국경제의 영웅으로 칭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와서 삼성 비자금 사건으로 특검에 연루되었고 한때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기도 했었다. 최근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등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로 사법리스크는 아직도 문제 되고 있다.

  생전에 국가에 대한 공로가 컸고 이제 고인이 되어 마지막 떠나는 이 회장에 정치권이 보다 경건한 마음으로 영전에 극락왕생을 기원하지는 못할망정 고인의 과거사에 대한 문제를 제기 힐난(詰難)하고 있음은 정치인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끝으로 본 필자는 합장(合掌)하여 고인의 영전에 삼가 경건한 마음으로 명복을 기원(祈願) 한다.
 

 김종하 <국민행동본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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