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람에 산다] (14) 全州예수병원 의료원장...설대위 博士
[보람에 산다] (14) 全州예수병원 의료원장...설대위 博士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10.23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컨대 한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 즉 모든사람이 죽은 것이다’ - 고린도 후서 5장14절.

 동학혁명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897년 미국인 마티 안골드 여의사에 의해 개원된 全州예수병원에서 36년째 仁術을 베풀며 보람을 찾고 있는 벽안(碧眼)의 老의사 설대위박사(미국명 David John Seel).

 “하느님의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국을 사랑했고,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한국사람들을 섬겼습니다. 한국인 특히 전라도 사람들과 보냈던 지난 35년은 즐거움과 감사의 시간이었을뿐 희생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자신이 ‘全州의 슈바이처’라고 불리워지는 것 조차 무척 거북해하는 설박사는 65년 생애의 절반 이상을 全州에서 보낸 까닭에서인지 전주에 대한 애착 또한 대단하다.

 25년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출생한 설박사가 인간의 생명을 가꾸고 치료하는 의학을 공부하게 된데는 목사로 南美에서 서교사업을 펼치던 부친의 영향이 컸던 것.

 

# 한국동란 참상듣고 선교사 자원

 설박사는 1948년 미국 루이지애나주 튜래인대학 의대를 졸업, 1953년 췌리티병원 외과전문의 과정을 수료했을때 6.25동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한국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마침내 의료선교사를 자원하기로 결심, 全州예수병원에 파송되었다.

 “제가 처음 도착했을때만해도 全州는 인구 8만의 도시로 피난민들이 대부분 하꼬방이나 다리밑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실정이었죠. 예수병원 역시 50병상도 채 못되는 작은 규모인데다 치료시설마저 극히 부족했습니다”

 전후부상자들의 치료에 밤낮없이 정성을 다하던 설박사가 암환자 치료에 온 젊음을 바치게된 계기는 30~40대의 젊은 나이에 병명도 모른채 죽어가는 한국인들을 지켜만 봐야하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되었다.

 

# 이 고장 癌치료의 대들보

 1958년 미국으로 건너가 3년간 종양외과학을 연구하고 돌아온 설박사는 1961년부터 국내 최초로 종양진찰실 개설, 암환자 등록사업을 실시하는 등 본격적인 암치료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1961~1965년 사이 설박사가 직접 메스를 잡고 혹을 떼어준 암환자수가 무려 260여 명에 이른다는 것.

 1969년 예수병원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설박사는 더욱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7년 병원장을 물러나 의료원장으로 취임하기까지 19년 동안 암치료뿐 아니라 의학발전을 위해 이루어놓은 업적들은 일일이 손꼽기조차 힘들다.

 441개로 병상 증설, 의학도서실 개관(1978년), 암환자 후원회구성(1982년), 완주군 고산에 분원 설립(1982년), 두경부 종양학회 창립(1984년), 기독의학 연구원 설립(1986년), 4편의 저서발간과 50여종의 논문 발표 등...

 특히 가장 연구와 치료가 까다롭고 위험률이 높아 미지의 상태에 놓여있던 두경부(머리와 목부분) 종양 연구를 체계화함으로써 오늘날의 암치료 의학발달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것은 설박사의 가장 큰 업적으로 손꼽히고 있다.

 

# 異國땅에서 의술 꽃피우기 36년

 17년 가까이 설박사와 함께 일해 왔다는 종양진찰실 외래감독 李준례 간호사는 “전국각지에서 암환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을때는 야식을 함께 먹어가며 진찰을 했을 정도”였다며 “하루 11~13시간씩 수술에 全心全力 몰두하고 있는 설박사의 모습에서 聖子의 모습을 느낀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고 존경심을 감추지 못한다.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수술에 임한다”는 설박사는 밤늦도록 수술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도 어김없이 새벽 4시반이면 기상, 새벽기도를 하고 6시30분 병원에 도착하여 회진을 하고 있다.

 “내년 여름경에 후배의사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할까 해요. 몸은 비록 미국에 가 있더라도 마음만은 항시 대한민국 全州에 와있을 겁니다”

 설박사는 “미국으로 돌아가면 36년간 몸에 익숙해진 한국문화와의 갈등으로 문화충격을 느끼게 될 것이 걱정된다”며 현재 부인 설매리 여사(미국명 Marg B. Seel)와 함께 살고 있는 중화산동 선교부 사택이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어 미국에 있는 집도 미리 해변만 있는 플로리다에서 노스캐롤라이나의 산꼭대기 집으로 옮겨 놓았다고.

 지난 1954년 임상병리과 기사인 아내와 5살짜리 장남의 손을 잡고 이방인의 나라 한국을 처음 찾아온 설박사도 36년여의 세월 앞에서는 환갑을 넘겨 세자녀를 모두 출가시키고 3명의 손주까지 둔 할아버지로 변해버렸다.

 어쩌면 설박사는 한국에서 생활한 기나긴 시간속에서 26년전 어느날 거의 질식상태로 병원을 찾아와 사경을 헤매던 2살짜리 아기가 자신의 정성스런 치료와 보살핌의 덕택으로 건강해져 퇴원했다는 사실 조차도 까맣게 잊어버렸을지 모른다. 26년전 그 아기가 지금 자신을 취재하고 잇는 기자인 것을...

 
강웅철 記 
김재춘 옮김
1989년 3월5일자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