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으로 나라 지켜낸 순창사람의 더운 숨결
목숨으로 나라 지켜낸 순창사람의 더운 숨결
  • 장교철 시인
  • 승인 2020.10.21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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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되짚는 전북 구국혼(13)순창

 빼앗긴 나라를 위해 더 힘든 길을 살다간 순창 선열들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11개 읍·면 어느 곳을 가든 나라를 위해, 순창을 위해 피땀을 흘리지 않은 곳이 없는 곳. 국난 때마다 앞장서서 의로움을 실천했던 순창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잊히고, 묻혀버려 무명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이들을 아직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뒤늦게 고인의 공훈을 추서하면서 알려진 양윤숙 의병장. 활동했던 공에 비해 아직도 지역 사람들에게도 낯선 이름. 족보에는 춘영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양윤숙으로 알려져있다. 별명인 연영, 인영, 등. 그와 함께했던 의병들도 대부분 가명이나 출생지를 감췄다.

 ■날개 꺾여도 봉황은 봉황 회문산 양윤숙 의병장

 구림면 과촌마을 회문산 자락 비탈진 땅에서 태어났다. 서른 살 나이에 태인의병으로 가담하여 면암과 돈헌 부대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하지만 면암 최익현과 돈헌 임병찬이 대마도에 감금된 현실을 침묵할 수 없었다. 1907년 정미년, 천혜의 조건을 갖춘 회문산을 근거지로 의병을 모아 ‘호남의금부’를 조직, 재기를 시작했다. 1908년 의병대장으로 추대된 그는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양 의병장은 1908년 11월, 최산흥 중군과 함께 의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이 의격문을 보고 참여한 의병 수만 천 명이 넘었다.

 <의격문>  적의 우두머리는 무리를 거느리고 누르니 누가 삼전리 강토를 다시 일으킬 것인가? (중략) 원수의 쓸개를 씹으며 생명을 버리고 의를 취하고자 하노니, 우주를 돌아다 보건대 열사는 몇이며, 거슬러 고금을 보건대 난적이 몇인고, (중략) 가만히 생각하니, 내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장차 앞장서서 군모의 원수를 갚을 것이리라. 병졸은 비록 정예치 못하나 마땅히 뒤에서 유격대가 되어 백성의 원한을 씻을 것이니, 그것은 나라의 행복이 되고 의려의 행복이다.

 ■무신(1908)11월 의병대장 양연영·중군 최산흥

 1909년 가을부터 본격적인 토벌 작전으로 부하들은 체포되고 조직이 와해됐다. 그해 12월, 김제로 피신했다가 쌍치면에 주둔하고 있던 헌병대에게 잡혔다. 36살 젊은 나이에 망국의 한을 가슴에 묻고 순국했다. 붙잡혔을 당시 일본 경찰이 함께 가담한 의병을 이르도록 압박했지만, 끝까지 발설하지 않았다. ‘나라를 위해 죽는 자에게 구차한 짓 하지 말라’며 죽음을 앞두고 옥중에서 남긴 마지막 유서. 세상에 당당했던 기개. 이 시대의 이웃 나라를 되씹어보게 한다.

 

 泌鳳折翼鳳爲鳳 나는 봉황이 날개 꺾여도 봉황은 봉황이며

 伏龍失珠龍爲龍 엎드린 용이 여의주를 잃어도 용은 용일세

 爾之國之大忠 今日之盛事 네 나라 큰 충신이 오늘 성사 이루었건만

 我之國之不忠 今日之落淚 우리나라 사람 불충하여 오늘 눈물 흘리네

  양윤숙 의병장의 묘는 27번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정표도 없고 안내문도 없다. 양윤숙 의병장과 함께 했던 순창 의병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본다.

 최산흥, 신보현, 구영숙, 김기룡, 김상기, 김선여, 허원칠, 박경락, 박경집, 신구산, 신성심, 양경학, 양윤택, 옹권삼, 옹태룡, 윤재일, 이황룡, 임태문, 정기선, 제봉렬, 김만룡, 김성칠, 김응선, 박선용, 권얼동, 김병갑, 김봉환, 김석기, 김성길, 김성재, 박춘경, 설진창, 양영준, 장석봉, 정사홍, 최석봉, 채영찬, 양경학, 진치언 그리고 무명의 의병 이름들.

 ■분단의 아픔고이 간직한 회문산 -- 새날을 꿈꾸던 사람들의 안식처

 순창 회문산은 풍전등화의 국운이 닥칠 때마다 이들을 품어주었다. 국권 회복을 위해 그가 수없이 오르내리던 회문산과 장군봉이 의연하게 나타난다. 과촌 마을 입구에 들어설 때까지 그 어느 곳에도 안내 표지판이 없다. 입구에 서 있는 ‘과촌마을’ 마을 석비. 몇 년전 까지만 해도 풀만 무성하던 생가터. 지금은 그 터에 별장과 펜션들이 들어서고 있다. 집을 지키고 있던 개들의 함성이 회문산 골짜기 침묵을 깬다. 되돌아 나온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오른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구림 연산 소재지까지 오는 동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기억했다. ‘큰 나라 섬기다가 거미줄 친 옥좌’에 ‘패옥 소리도 없었’던 구한말, 일본군과 그들의 앞잡이들을 맞서야 했던 구국의 현장, 6.25의 동족상잔 상흔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은 곳. 같은 민족끼리, 가까운 이웃끼리 무서운 세상을 견뎌온 이곳은 아직도 엄숙해야 할 곳이 아니던가.

 화암 마을에 닿자 낡은 표지판이 보인다. 면암 최익현 피체지. 동족끼리 살생을 원하지 않았던 그는 이곳에서 잡혀 대마도에서 순국하고 만다. 양윤숙 의병장이 1908년 꽃바위에서 일본 헌병 순사 120명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곳. 순창의 산하는 알고 있다.

 쌍치면 영광정으로 가는 길목인 오정자 마을. 아직도 소설가 윤정모의 소설 ‘들’의 배경이 완연하다. 이 소설은 도실마을의 구조적 모순과 구시대의 횡포와 착취에 맞선 농민들의 투쟁을 쓴 이야기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당시 순창에서 농민회와 여성농민회 활동을 뜨겁게 했던 이름들. 지금도 앞선 선열들이 소망했던 순창과 나라를 생각하며 길을 내고 있을 실제 이름을 호명하다 보니 밤재를 넘어 쌍치면이다. 토벌대가 빨치산 소탕 명목으로 이곳 주민들을 모조리 쫓아낸 이른바 견벽청야 작전으로 초토화된 곳. 이곳에 유일하게 불타지 않았던 영광정(迎狂亭).

 ■영광정 미친사람 행세하며 8인의 의사항일투쟁

 1910년 경술국치에 맞서기 위해 쌍치 주민 8분이 나라 잃은 설움을 미치광이 행세하면서 모임을 했던 곳. 나라가 망했는데 어찌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으랴. 이들은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면서 의병을 모으고 독립자금을 모으는 등 항일 투쟁을 벌였다. 중심인물은 금옹 김원중. 뜻을 모아 항일 투쟁을 같이했던 8명의 동지 이름을 불러본다. 김정중, 설문호, 이봉운, 안종수, 송극빈, 김요명, 이항로 그리고 김원중. 이 영광정은 오랜 세월 돌보는 이 없이 낡아갔지만 1991년 해체 복원한 후 쌍치면민회에서 유족들을 모시고 3.1절에 ‘영광정 8인 의사 추모제’를 열고 있다. 주민들의 순창정신이 빛난 대목이다.
 

  #하서정신 빛난 훈몽재 후손들 항일독립운동 앞장서

 하서는 인종 승하 후 장성으로 낙향하여 추령천이 흐르는 이곳에 ‘훈몽재’를 마련하고 후학들에게 의(義)를 가르쳤다. 금옹은 호남 성리학을 일궈낸 하서 김인후의 후손이며, 일제강탈과 이승만 독재 정권에 분연히 맞섰던 김병로는 하서의 15손이다. 김병로는 젊은 나이에 면암 부대에서 활약했다. 일제 강점기 ‘항일변호사’로, 광복 후 이승만 독재 정부 땐 ‘민주 헌정의 수호자’로, ‘청렴결백한 공직자’로 전범을 보여준 인물이다. ‘국가의 독립, 사법부의 독립, 민주주의 실현’을 실현하고자 했던 지공무사(至公無私) 인물이다.

 임병찬 부대에서 함께 했던 김정수와 아들 김상기, 정신보현 부대에서 선봉장으로 활동한 김선여, 함께 참여한 김성칠, 상해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하고 김일두 등 독립투사를 보호해준 김재석 등 하서 정신을 이어온 순창의 독립운동가의 혁혁한 공을 잊을 수 없다. 그래서 복흥 낙덕정은 하서나 가인을 기리는 일 못지않게 이들의 나라정신도 함께 선양해야 할 공간으로 확장하길 바란다.

 오랜만에 길을 걸었다. 순창 정신이 가까이 있다는 걸 확인했다. 신념으로, 실천으로 보여줬던 순창사람들. 순창 사람들이 이겨온 역사, 오늘 순창 사람들이 기억하고 이어간다.

 

장교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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