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천에서
전주천에서
  • 최정호 대자인병원 성형외과 과장
  • 승인 2020.10.06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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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턴가 아침 5시면 눈이 떠진다. 조금 지척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어두운 밖으로 나간다. 아파트에서 전주천 가는 길은 신호등 2개만 지나면 된다. 멀리서 달려오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내 눈을 거스른다. 띄엄띄엄 돌다리가 놓여 있어 천 건너편으로 가서 걷는다. 아직 태양이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듯 세상은 캄캄하지만 여기저기 고층 아파트의 불켜진 창들이 보인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날은 물소리와 함께 살아있는 듯 생동감을 더 한다. 상선약수라 하지 않았던가? 물만큼 변화무쌍한 것이 있으랴? 어스름한 빛이 어느 듯 성큼 다가온다. 십여리쯤 걷다 보면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뒤뚱거리고, 어떤 사람은 종종걸음으로 걷는다. 가만히 살펴보면 나이 든 사람은 젊은이들과 어둠 속에서도 구별된다. 왜냐하면 행동거지가 굼뜨고, 몸의 균형을 간신히 유지해나가는 모습이 위태위태하다. 늦은 밤인지 이른 새벽인지 분간이 안되다가 사물이 서서히 윤곽이 나타나서 하늘을 보면 동쪽이 어느 방향인지 알 수 있다. 반환점을 돌아 돌다리를 건너면 아침이 성큼 와있다. 히끄므래한 색깔의 우아한 두루미가 물속을 기웃거리거나 잠이 덜 깬 듯 우두커니 서 있다. 어디서 자다가 아침에 날라왔는지 아니면 밤새도록 그 자리에서 잤는지 모르겠다. 요즈음은 바깥 날씨가 쌀쌀하여 천변가의 잡초들도 추위를 타는 듯한데 …. 그래도 물속에서 노니는 물고기들은 한기를 모르는듯 파닥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검은색의 까치들은 무엇을 찾는지 하릴없이 지저귀며 삼삼오오 하늘을 나른다. 아직 벌레들은 이슬을 머금은 풀밭에서 자고 있는지 기척이 없구나. 오랜만에 손이 곱아 손바닥을 비벼본다. 유년의 기억은 손에서 구린내가 나야 하는데 냄새를 알 수 없다. 손에 기름기가 빠져서인가? 아니면 냄새를 맡는 능력이 감퇴 되어서인가? 잘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조국과 추미애가 나쁜 것인가? 아니면 내 감각이 무디어져서 그들의 죄악을 느끼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다.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아 어느 말을 믿어야 할지 헷갈린다. 그것뿐이랴 어디 시빗거리가. 어제는 강경화의 남편이 미국으로 요트 사러 갔다고 특혜라나 어쩐다나…. 서해 상에서 공무원 한 명이 월북하다가 북한 사람들한테 총 맞고 불에 타 죽었다고 하더니 그 원인과 과정이 어떻고 그래서 야당은 모든 것이 대통령 책임이라고 한단다. 원형 경기장의 검투사처럼 자기편의 이익을 위해 정치인들이 우기는 것은 나름 이해가 간다. 그런데 SNS가 왕성하다 보니 날 선 그들의 칼날이 내 턱밑에까지 밀려와 우리도 불편하게 한다. 정치의 일상화는 긍정적인 측면에도 부정적인 면도 많다. 비상식의 상식화라고나 할까? 즐겁기도 하지만 짜증도 나게 한다. 그에 비하면 새벽을 여는 전주천 아침 마실은 나를 차분하게 반성시키며, 자연과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람과 인위적 물건들 사이에서 살고 있다. 그냥 내가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한없이 가벼운 존재임을 자각하는 이 순간이야말로 이 자연에서 가장 위대한 시간이 아니던가? 오늘 아침 나는 잃어버린 나를 찾은 기분이다. 그냥 나는 걸어가는 나일 뿐이다. 사나운 지난여름 물난리에도 떠밀려 가지 않은 돌징검다리는 군데군데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생명체는 시간의 흐름에, 공간의 펼쳐 짐에 반역하여 개체의 내적 공간 안에서 시간에 의한 열역학 제2법칙을 어기는 존재라는 화이트헤드는 물질과 생명의 본질을 꽤 뚫지 않았는가? 시간을 이기는 존재는 없다.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에 묻히고 만다. 손바닥에서 닭똥 냄새를 맡으며 키득거리던 어린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나의 발걸음은 비틀거리며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고 있지 않은가? 85세의 노모는 60살의 아들의 아침 산책을 반기고 조식 준비로 바쁘다. 낼 모래면 염라대왕께 불려 가셔도 이상하지 않은 어머니도 늙은 아들의 아침식사를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한다. 생명체는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또 그 아들로 이렇게 전달되는 DNA 전달기계가 아닌가? 전주천 물소리가 귀 뒤로 멀어지고 나는 새로이 아침을 향해 나아간다.

 최정호<대자인병원 성형외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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