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86> 야은 길재의 예(禮)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86> 야은 길재의 예(禮)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 승인 2020.10.04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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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채미정(採薇亭 명승 제52호), 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영조 44년(1768)에 창건되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10년 만에 역마를 타고 개경에 돌아온 소회를 밝힌 내용이다. 정종 2년(1400년) 세제(世弟)인 이방원은 동문수학했던 길재를 천거하여 정종이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임명한다. 그러자 길재는 정종보다 이방원을 먼저 찾아가 관직을 거절한다. 이에 이방원은 ‘그대가 말하는 강상(綱常)은 바꿀 수 없는 도리요. 부른 것은 나지만 벼슬을 내린 것은 주상이니 주상께 고하라고 하자’ 그는 바로 정종에게 가서 내린 관직을 고사한다. 이때 불사이군(不事二君),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절의를 보이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길재는 일찍이 이방원과 함께 성균관에서 수학하기도 하고, 한 마을에서 왕래하며 친분이 돈독하였다. 이방원은 즉위 후에도 그를 잊지 않고 관직을 주고자 했으나 거절한다. 태종은 이러한 그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여 세종이 즉위한 뒤에 길재의 아들 사순(師舜)을 등용하게 했다. 그는 벼슬길에 나가는 아들에게 “임금이 먼저 신하를 불러 보는 것은 3대 이후의 드문 일이니, 너는 마땅히 내가 고려에 쏟는 마음과 같이 네 조선의 임금을 섬기도록 하라”고 이른다.

  길재는 아버지가 관원이었으나 대부분 떨어져 지내게 되어 어머니와 함께 곤궁한 생활을 했다. 겨우 5~9세에 산에서 나무하고 좀 더 커서는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글을 읽었다. 그의 글에 “10년의 고학은 춥고 배곯았으며 전답에서 비맞고 손발이 더러워도 태연했다. 나의 꿈은 태평성세가 실현될 수 있도록 치정하는 것이었으나 임금의 상을 만나 십년공부가 무너지는구나.”하며 경북 선산으로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한다.

  길재에게서 교육을 받고자 한 생도는 사대부 자제는 물론 천민의 자제까지 하루에도 100여 명이 넘었다. 그는 귀천에 차등을 두지 않고 똑같이 경학은 물론 평상시의 생활 자세에 대해 가르쳤다. “예는 평소에는 사람에 대한 인사와 도리의 이행이며 변을 당했을 때는 절의로써 상대방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라” 했으니 예에도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구절이다. 그는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도 정성을 다했다. 잠자리에 드실 때는 이부자리를 펴드리고 아침에 거두는 일을 몸소 시행했다. 처자가 그것을 대신하고자 하여도 “어머님이 늙으셔서 뒷날 이와 같은 일을 하고 싶어도 그때는 할 수가 없을 것이라며 거절하고 몸소 행하였다. 이렇게 충과 효와 예를 몸으로 직접 실천했던 인물이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자연과 함께하는 시간에 차가 있었던 것 같다. 다음은 길재의 「山家序」의 내용이다.

 

  회오리 바람 불지 않으니/ 단칸방도 편안하네/

  명월(明月)이 뜰에 가득하니/ 홀로 천천히 거닌다네/

  처마 끝에 비 내리는 날이면/ 배게 높이 베고 편안히 잠들고/

  산속에 눈이 펄펄 날릴 때면/ 홀로 차 끓여 마신다네.

 

  길재의 산가의 맛이라고 할까. 단칸방의 초라함이 더욱 편안하고 뜰에 비친 환한 달빛은 벗 삼아 거닐기에 족하며, 비 내리는 날 처마 끝에 물소리 들으며 꿈을 꾸듯 잠들고, 겨울날 눈 내릴 때면 차 끓여 홀로 마시니 이것이 산거의 즐거움임을 표현한 듯하다.

  어린 날의 고생은 태평성세에 쓰이기 위함이었건만 그마저 할 수 없어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니 학문의 쓰임은 반드시 관직에만 있는 것이 아님이 새삼 느껴지는 길재의 삶이다.

 / 글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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