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자의 음유 「고엽」: 이브 몽땅
시간여행자의 음유 「고엽」: 이브 몽땅
  • 김유석 시인
  • 승인 2020.09.22 1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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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28>

 연필 깍는 소리 같다. 가을비 추근거리는 밤, 하루치의 생업을 긁적이느라 몽당해진 어둠을 갉는 풀벌레 울음. 설익은 과일 빛으로 내어 놓는 들창 불빛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또 있을 것만 같아서 철없는 저 풀벌레 소리를 베껴 적는다. 느릅 이파리에 깃드는 자잘한 바람결을 적고 낮 동안 끌다 온 들길을 적고, 어쩜 내 것이 아닌 삶을 뒷장에 자국이 박히도록 꾹꾹 눌러 적는다.

  내게 음악이란 그처럼 공명하는 감정을 표절하는 것, 그렇거나 꼭 그렇진 않을지라도 나의 노래는 적어도 두 개의 감정으로 휘청거리는 생을 추스르는데 쓰인다.

  막연해지는 순간이 먼저다.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데 좀처럼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 달팽이관을 자극하는 게 노래다. 사랑하고 멀어지고, 방황하던 순간들을 소환하는 이때의 곡조들은 무작정 좋다. 한 쪽 귀로 흘러들어 한 쪽 귀로 빠지는 뽕짝이나 R&B 정도쯤이면 난감한 가슴이 가지런해 질 수 있다.

  둘 중 하나의 경우는 좀 더 각별하다. 음악여정을 떠나는 것이다. 여러 개의 서랍이 딸린 시간 속에 좀 슨 것들을 슬그머니 꺼내 지난날의 나를 찾아가는 일을 노래에 맡긴다. 수많은 야누스로 살아 온 나를 알아볼 수 있는 건 시詩보다 음악이 우선일 수 있으므로 나는 때때로 시시껄렁한 노래에 기꺼이 신세지곤 한다.

  내 방엔 여러 개의 시계가 들어 있다. 물려받은 아버지의 구식 손목으로부터 짝퉁인 명품까지 저마다의 시간을 가리킨 채 멎은 고물들이다. 어떤 시간은 죽은 줄도 모르고 여전히 바지런한 소리를 내고 어떤 것은 그저 뜬 눈의 시체 같다. 그 중 가짜 불알을 달고 살아있는 척 벽 구석에 등을 붙인 러시아 인형모양의 시간이 내내 미심쩍다.

  사실 난 죽은 시계가 두렵다. 시계가 멎으면 세상도 끝이라 생각했던 유년의 기억 탓이다. 시계가 제자리걸음을 할 때마다 이상한 밥을 먹여 시간을 살려내던 아버지. 자명종 소리를 베야 잠들 수 있던 날들이 신기하게 생생하다. 그리하여 파리똥 쩐 저 벽시계를 애착하는 것일까, 한밤중 마주치는 그것의 눈길에 목덜미를 훔치는 서늘한 버릇 때문일지. 애써 외면하여도 흘깃 다시 의식하고야 마는 시간에 나는 태엽 대신 음악을 감곤 한다. 그 순간 다시 바늘이 움직인다. 거꾸로 돈다. 공연히 끌리다보면 홀연 발바닥이 닳아 없어지는 시간의 유령에 어디로든지 홀린다.

  이 밤은 고적한 숲길로 나를 데려왔다. 한 번쯤 와 봤고 몇 번은 잘못 든 것 같은 길섶일 것이다. 길이란 그러나, 놓였을 때보다 하염없이 헤맬 때가 훨씬 구체적인 법, 아마 이런 길 위에서 흥얼거려야 할 음률이라면「고엽Les Feuilles Mortes」이 그 중 하나다.

 

  오! 나는 그대가 기억하기를 간절히 원해요

  정다웠던 우리의 행복한 날들을 ……

 

  <자끄 프레베르Jacques Prevert>의 시를 멜랑콜리한 멜로디에 얹은 이 곡은「밤의 문Les portes de la nuit」이란 프랑스 영화의 주제가이다. 2차 대전 후 역사적 수치와 죄책감이 공존하는 파리의 정서를 비극적 사랑을 통해 그려낸 영상 속의 ‘고엽’은 영화보다 화제가 되었고 지금까지 불러지는 명곡으로 남았지만,

  회상에 젖는 원곡의 의미와 달리 나는 이 노래 속을 걸어서 불온하고 불화했던 젊은 날의 나를 찾아가곤 한다. 방황과 좌절 속에 함부로 떨어져 뒹굴고 함부로 밟히던 이십대의 삽화쯤일 거다. 최루탄이 터질 때마다 시계가 멈춰 세상이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유년의 두려움을 짓누르던 순간과 철로연변 하숙방에 처박혀 퇴폐적인 연애나 꿈꾸던 막연한 나날들이 흑백필름처럼 노래에 되감긴다. 그러다가 필경 시대로부터의 도피를 감행하고야 말았으니

  이 밤, 노래 속에서 만난 건 한 번뿐인 청춘을 대부분 썩는 연습을 하던 주책없는 청년이다. 그는 어느 가을날에 죽어 있다. 죽은 줄도 모르고 몇 걸음 뒤에서 허밍으로 가랑잎 소리를 낸다. 그의 기척에 진공관이 되는 가슴은 뭔가 잘못 살아 온 듯 공명하지만 그때 참 잘 죽었는지 모른다.

 

 글 = 김유석 시인

 ◆ 김유석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놀이의 방식』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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