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오늘, 100년전 오늘
지금의 오늘, 100년전 오늘
  • 익산=김현주 기자
  • 승인 2020.09.10 13: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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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110년 만주로 간 전북인들 <10>

올해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지 꼭 110년 되는 해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독립전쟁을 선포한 지 100년이 된다.

 100년전 한반도에 거주했던 한국인들은 제국주의 통치에 맞서 싸웠다. 일본 제국주의는 굴종과 순응을 강요했지만 한국인들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전쟁을 치뤘다.

 대한제국기에 융희황제가 넘긴 주권을 찾기 위해 ‘민(民)’은 세계 만천하에 독립을 선언했으며, 바로 대한민국을 세웠다.

 젊은이들은 만주로, 만주로, 독립군이 되기 위해 자신을 내던졌다. 대한제국이 무너지자 ‘민’은 보호막이 없어진 슬픈 존재로 전락했으며, 각자 도생의 길을 걸어야 했다.

 참혹했고, 고통스러웠지만 이 민족의 지배를 현실로 받았들여만 했다. 더 이상 국내에서 생활할 수 없는 자들은 이주의 고행길에 동참하게 됐다. 오늘날 중국 동북지방에 남아 조선족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원형은 이렇게 형성됐다.

전북인들이 이용했던 도문철도
전북인들이 이용했던 도문철도

 ■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지금 인천과 연길을 오가는 직항노선은 전세기로서 한국과 중국을 잇는 항공노선 가운데 거리대비 가장 비싼 노선이다. 연변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이 반영된 노선이다. 그만큼 소통의 강도가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매일 오전 10시 30분, 연길 조양천 국제공항(연길공항)에 내린 한국인들 가운데 연길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순수 관광객들은 연길 시내에 여장을 풀고 바로 용정으로 향한다.

 해마다 필자(김주용 교수)는 여러 차례 연길과 한국을 오갔다. 2010년대 어느 날 필자는 조양천 국제공항에서 연변대 친구들과 해후했다. 루이펑(승합차)은 바로 연길시 개발구를 끼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이제 용정에 부드럽게 안착하는 일만 남았다. 연변 사적지 관광의 제1코스의 제1보를 내딛는 것이다.

 톨게이트에 10위안의 요금을 지불하면 동양 최대 사과·배(핑궈리) 과수원을 덤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흔히 오늘날 조선족의 이중성을 논할 때 ‘사과·배 이론’을 인용하곤 한다.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 모국을 가진 민족, 고유한 언어를 유지하면서 민족대학도 운영하고 있는 민족, 모국과 조국 사이에서 갈등하는 민족, 이것이 조선족이 처해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조성일은 그의 글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 다음과 같이 이중성을 정리했다.

 “조선족은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바꿔 말하면 조선족은 중국 공민이며, 중화민족의 구성원이며, 조선반도의 국민과 동일선상에 있는 조선민족이다. 따라서 조선족은 이중성을 갖는다.”

 이 견해가 개인적이든 아니든 한동안 조선족의 이중성 논란이 계속되다가 이제는 좀 더 차원 높은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문제는 중국이 아닌 제3국에서 인식하는 조선족에 대한 위치가 아니라 조선족 자체를 인식하고 있는 자신들의 정체성일 것이다. 그들 자신이 중국 공민이라고 인식하면 이중성 문제는 아예 논의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화교의 예를 적용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우리가 이제 경청해야 할 말이다. 

중국 도문 해관에서 바라본 북녁땅
중국 도문 해관에서 바라본 북녁땅

 ■ 제국주의 시대, 전북인이 도착했던 투먼(圖們)시에서 다시 송강진으로

 두만강, 우리에게는 익숙한 이름이다. 중국에서는 한자로 도문(圖們)이라고 쓴다. 도문, 중국어 발음으로 투먼, 1712년에 세운 백두산정계비의 비문 가운데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에서 토문(土門) 역시 중국어로 투먼이다. 중국에서 투먼은 도문강의 국경도시다. 도문은 만주어로 모든 물의 근원이라 한다. 도문의 원명은 회막동 이었는데, 1933년 도문으로 고처 불렀다.

 현재 도문시(市) 10만 인구 가운데 50% 이상이 조선족일 정도로 민족적 색채가 강한 도시다. 도문 톨게이트에서 중심거리를 따라 9.6km에 위치한 도문해관은 주로 북한과의 무역창구다.

 “어 자세히 보니, 강산에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은 안보이네. 이미 무산부터 푸른 물은 마음에만 있는 것 같네요. 철광석 공장이 들어서서” 함께 동행했던 연변대 교수의 말이다.

 지금이야 덜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도문을 거닐 수 있지만, 70여 년 전 이곳에는 수많은 전북인들은 도문역을 지나 조양천역에서 다시 안도현으로 이주했다.

 180여 가구가 도문에서 두 패로 나뉘었다. 한 팀은 왕청현 하마탕이고 다른 한 팀은 도문 정암촌이었다. 그들이 건넌 두만강으로 이제는 한반도 남쪽의 사람들이 건널 수 없게 됐다. 통일이 된다면 모를까. 곳곳에 ‘나진선봉 2박 3일 코스’ 관광포스터가 붙어 있다.

 이주민들은 안도현 명월구역에서 트럭을 타고 송강진까지 와서 다시 남도툰에 정착했다. 전북인들은 백두산 자락 안도현에서 새로운 터전을 잡고 수전농업에 종사했으며, 집단마을 생활을 시작했다.

용정촌
용정촌

  ■ 전북출신 1세대 후예들

 2002년 한·일월드컵이 한창일 때 지금은 중국 용정 3·13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광평 사진작가는 연변지역 답사를 진행하고 있는 필자(現 김주용 교수 원광대 동북아인문사회연구소)에게 연변에 집단이주한 분들의 이야기와 답사를 제안했다.

 먼저 1937년 집단 이주민이 정착했던 하마탕을 다녀왔다. 하마탕은 주로 강원도 출신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다음 송강진을 다녀왔다. 지금은 길이 좋아져서 연길에서 백두산을 가기 위해 안도현으로 방향을 틀어 1시간 30분 정도 달리면 송강진에 도착할 수 있다.

 이곳에는 전북 출신 1세대들은 거의 살고 있지 않지 않다. 세월의 무게는 결코 게으른 후생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디아스포라’ 학계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다. 원래 이스라엘인들이 자신의 터전을 떠나 세계 곳곳을 이주하였다는 뜻에서 비롯됐다.

 우리에게는 재외 동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전 세계에 약 750만 명이나 된다. 몇 해 전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도인 연길시에서 큰 식당을 운영하는 전북 김제 출신 사장님을 만난 적이 있다. 자신은 2세대이며 그래도 성공한 축에 속한다고 하면서 부모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속내를 드러냈다.

 ‘거시기’라는 전라도 사투리를 은연중에 자랑하면서(?) 쓰고 있었다. 2020년, 대한민국은 코로나19 속에서도 재외동포의 송환을 추진하고 실행했다.

 모국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아닌 대한민국의 힘이 그들에게 미쳤고, 그것은 향후 대한민국의 또 다른 힘으로 작용할 자양분이다. 80여년전에 만주로 떠났던 전북인들 가운데 해방 이후에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라도 그들에 대한 전수 조사와 현장 조사를 벌여 쌀의 고장 전북 출신이 가꾸어 놓은 중국 동북지방의 수전(水田) 지대를 중국과 공동으로 연구하는 토대가 마련됐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본다.

 <에필로그>원광대 동북아다이멘션연구단 집필진 인터뷰

 ▲김주용 교수 “전북인들이 만주에서 살았던 공간의 역사 소중합니다”

 시간의 역사 속에서 잃어버린 공간의 역사를 찾는 길은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보람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안도현, 전라북도 사람들이 손톱에 피를 흘리면서 가꾸었던 경작지와 그들이 거주했던 공간을 후손들이 찾아가는 것은 공간의 역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후대들에게 점점 잊혀져가기 때문입니다.

 망각되어 가는 역사는 어느 누구도 되살려 주지 않습니다. 바로 공간의 역사, 전북인들이 만주에서 살았던 공간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 민족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싶은 욕심은 과한 것일까? 그 소중함의 역사를 함께 걸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이용범 연구교수 “만주로 이주한 동포들, 우리의 형제자매 입니다”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배운 역사를 가만히 돌이켜보면, 의외로 일반인들의 삶을 다룬 것들이 거의 없다는 데에 놀라게 됩니다.

 사실, 왕조가 어떻고, 정치지도자 누가 무슨 일을 했었고, 하는 일들은 우리들의 삶과는 크게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힘든 삶을 이어갔던 사람들, 한반도를 가로질러 만주에까지 걸어간 사람들,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었고 또 형제자매이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잊혀진 역사들이야 말로 연구자들이 찾아내고 널리 알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앞으로도 원광대 HK+ 동북아다이멘션연구단은 지역사회의 여러분과 눈높이를 함께하며, 동북아지역의 평화공존은 위한 학문적 모색을 계속하고자 합니다.

 

 ▲박성호 연구교수 “이주민들에게 만주는 타국 땅 이지만 제2의 고향입니다”

 일제의 감언이설에 속아 고향을 떠나 만주로 이주한 전북인들. 해방 직후에 고향으로 귀환하지 못한 전북인은 만주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만주는 타국임과 동시에 제2의 고향이겠지요. 만주에 정착할 당시에 전북인의 삶은 평탄치 않았습니다.

 죽지 못해 살았을 정도로 힘겨운 삶을 살았습니다. 만주로 간 전북인의 삶을 글로 옮겨 적으며,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그 당시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만주로 간 전북인의 삶을 글로 쓴다는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기록에는 기억하는 힘이 있습니다. 저는 만주에서 힘겹게 살아간 전북인의 삶을 기록하면서 그들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광대 HK+ 동북아다이멘션연구단과 전북도민일보가 함께 한 기획연재 ‘경술국치 110년, 만주로 간 전북인들과 그들의 삶’을 접한 독자 모두가 만주로 이주한 전북인을 꼭 기억해 주길 바랍니다.
 

 ▲이명진 연구원 “전북지역의 근대사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분야가 많습니다”

 근대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이번 ‘경술국치 110년 만주로 간 사람들’ 기획연재는 매우 특별했습니다. 지역민들에게 조차도 다소 생소했던 주제였던 만큼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나 생소했던 만큼 자료수집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기획연재가 특별했던 것은 잊혀진 사람들의 흔적을 찾는 과정에서 얻어진 결과물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지역사회에 알려지지 않았던 개개인의 기억을 담은 구술자료와 어느 곳에서도 공개되지 않았던 자료들을 발굴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전북지역의 근대사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분야가 많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를 통해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이 발굴됐으면 합니다.

 

 ▲이석형 연구원 “조선족에 대한 정보, 부정적인 정보가 대다수 입니다”

 최근 다양한 매체들 속에서 대량의 역사 정보가 제공되어 많은 사람들이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분별한 역사 정보는 우리의 인식, 가치 판단에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선족에 대한 인식이 대표적입니다.

 현재 조선족 관련 정보는 언론을 통해 많이 제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정보가 대다수입니다. 범죄에 연루돼 있거나, 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한 것들이 많습니다.

 이번 연재기사에서도 밝혔듯이 그들은 100여년전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던 이웃이었습니다. 이주민들은 근대 개화시기를 거쳐 조국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독립운동을 위해 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떠났습니다.

 이번 기획연재를 위해 전북 출신 조선족 어르신들의 관련 정보를 수집하며 그들의 이주 과정과 삶의 고통이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은 매우 고단했으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이번 기획연재를 통해 그들의 노력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익산=김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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