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26> 꿈의 바람
[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26> 꿈의 바람
  • 이영종 시인
  • 승인 2020.09.08 17: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울적하다. 비좁아 갑갑하다. 발과 눈을 눌러 공간과 시간 여행자가 되어 본다. ‘꿈의 바람’이 불어온다. 길고 오래된 것이 느릿하게 흘러간다. 아득하게 먼 곳이 은은하게 구름을 두드린다. 마두금 소리다.

 몽골 한 소년의 꿈에 사랑하던 말이 나타나, 뼈로 목을, 말총으로 두 개의 현을, 가죽으로 울림통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준다. 소년은 말을 잘 안다. 아니, 그 느낌이 손끝에서 초원처럼 살아 있다. 시린 옆구리에게 주려고 광활한 풀밭에 씨줄과 날줄을 날리던 기억이 거칠게 달려온다. 눈 깜박할 사이에 휘몰아 온 첫사랑 같던 야생말이 호스 타이 산등성이에서 식구들과 풀 뜯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여준다. 보려는 대로 보여주지 않아야 깊이 오래 보게 된다는 듯이. 소년은 말의 눈을 생각하며, 말머리 조각을 모양내 넣는다. 몽골의 전설이 들려온다. 말갛고, 고요하다. 따듯하고, 보드랍다. 구슬프고, 그윽하다.

 젊은 시절 연인이 테를지 국립공원 게르 앞에 앉아 별을 따 달라고 조른다. 별의 냇물에 들어가 족대로 훑으면, 파닥이는 별들이 큰 양동이에 가득 찰 것 같다. 별을 따는 것은 이룰 수 없으므로 꿈이라 생각한다. 성취할 수 있는 것은 목표다. 하지만 별이 있어야 별빛을 볼 수 있다. ‘바람의 꿈’이 아니라, ‘꿈의 바람’이어서 좋다. 꿈의 잠, 꿈의 초침, 꿈의 밥, 꿈의 가방, 꿈의 인사, 꿈의 슬리퍼, 꿈의 마우스, 꿈의 저녁, 꿈의 노래. 여러 어휘들에게 꿈의 등에 ‘앞으로나란히’를 해보라고 한다. 별 목걸이를 선물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 목 기다란 다짐이 이루어졌는지는 비밀이다.

  ‘하얀 달’이 우리를 내려다본다. 몽골의 설날 ‘차강 사르’의 꿈이 달에 하얗게 붐비고 있다. 가없이 크고 드넓다. 그 꿈, 우리네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 면적의 7배, 국토의 80%가 초원으로 이루어진 몽골을 닮은 마두금 소리가 마음의 답답함을 거침없이 넓혀준다. 지구에서 326만 광년 정도 떨어져 있는 별이 초당 약 70킬로미터의 속도로 멀어지는 것처럼.

 작드수렝(N. Zagdsuren)이 연주한다. 속이 풀리고 내려 후련하다. 맑은 느낌이 있어 산뜻하고 가뿐하다. 마음이 활짝 트이어 시원하고 서글서글하다. 찾아본 그의 역사는 이렇다. 전) 몽골 ‘아얄고(Ayalguu)’ 앙상블 단원, 전) 한국 악단 ‘실크로드’, ‘아리수’ 마두금 연주자, 2004 몽골 청소년 마두금 대회 금상, 2005 몽골 대학생 예술 대회 금상, 2015 몽골 마두금 경연 대회 ‘후후 남질’ 우수 연주자, 한국 영화 <최종병기 활> OST 마두금 연주, 일본, 중국, 러시아, 이탈리아 등 국제공연 다수 참가.

 하잘것없이 작은 내가 현실적 자유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주파수는 16Hz ~ 20,000Hz 정도다. 그 바깥에 있는 소리의 아름다운 귓속말을 우리는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울림을 주는 파동의 강에 도파민을 흘러넘치게 하여 행복할 수 있는 존재다. 지렁이 울음이 있다 하여, 누가 동영상 올린 것을 신기하게 들어 보았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추천해 주면, 기쁘게 들었다. 슬플 땐 슬픈 게 좋다 하여, 슬픔이 슬픔에게 어깨를 빌려주는 음악을 들었다.

 입이 하나 있고, 귀가 둘 있는 이유는 두 배로 들으라는 것이다. 먹고, 걷고, 놀고, 말하여 기어이 평화로운 저물녘에 닿는 소리를. 양고기와 야채를 돌로 달군 ‘허르헉’ 대신, 동물도 치유해 준다는 선율을 먹는다. 말젖이 나무통 속에서 흔들리다 마유주가 되는 소리를 마신다. 타인의 이유가 아닌 나의 이유로 한낮을 걷는다. 야생마처럼 마음대로 떠돌았던 희랍인 ‘조르바’는 우리를 향해 말한다. “온몸으로 살라고. 온 마음으로 느끼라고. 온 힘으로 사랑하라고. 당신을 얽매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실체는 상상뿐이다. 내 안에 있는 나와 같은 속눈썹을 가진 모래알들과 샌드 슬라이딩을 즐긴다.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내일을 닫지 않으려 까치발로 불어오는 바람에게 “내가 사랑하는 한 사람 있고, 나를 사랑하는 한 사람 있음에 틀림없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제 ‘꿈의 바람’은 말갈기 휘날리며 저 먼 그리움을 향해 달려간다.

 

 글 = 이영종 시인

 ◆ 이영종

 15회 박재삼문학제 신인문학상 백일장 대상, 2020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