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너머
보릿고개 너머
  • 오창렬 시인
  • 승인 2020.09.01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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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25>

 2020년 현재 우리나라에는 가히 트로트 열풍이라 할 만한 뜨거운 바람이 불고 있다. TV를 켜면, 여기도 저기도 트롯이다. 본방에, 재방에, 저녁에도 트롯, 밤에도 트롯이다. ‘내일은 ○○트롯’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자가 다양해지자, 채널마다 트로트 프로그램이 홍수처럼 쏟아진다. ‘트롯신이 떴다’, ‘트로트가 좋아’, ‘나는 트로트 가수다’, ‘트로트의 민족’, ‘트롯 전국체전’, … 트롯이 미디어를 덮고 있다. 한 대중음악평론가는 ‘내일은 ○○○트롯’ 시청률이 33%인 것은 트로트가 우리 일상에 뿌리내려져 있었다고, 한의 정서와 맥락을 같이해온 장르라 폭발한 것이라고 진단한다. 과연 트롯이 일상이 된 느낌이다.

 요즘에 들리는 트로트 중에 ‘보릿고개’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를 열다섯이 안된 어린 가수도 따라부르고 또 사람들이 뜨겁게 반응하니, 다양한 계층이 즐긴다고 할 만하다. 한 포털 사이트에서는 보릿고개를 “지난가을에 수확한 양식은 바닥이 나고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은 5~6월(음력 4~5월), 농가 생활에 식량 사정이 매우 어려운 고비.”라 풀고 있다. 무역 규모가 세계 10위 안팎인 오늘날엔 상상조차 어려우나, 일제강점기에서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연례행사처럼 찾아들던 농촌의 빈곤상(貧困相)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노래는 ‘초근목피’, ‘물 한 바가지’ 등의 노랫말을 통해 보릿고개의 실상을 콕 찍어 설명해준다. 풀때죽 한 그릇으로 허기를 겨우 속였지만, 그 허기가 언제 고개를 들지 몰라 뛰지도 울지도 말라고 자식에게 강조해야 했던 시절이 그것이다. 가수가 지금 와서 그 시절을 새삼스럽게 추억하는 까닭은 개인적인 체험 때문일 것이다. 이제 성공한 어른이 되어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셨던” 그 시절의 어머니에게 따듯한 밥 한 그릇을 대접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것조차 여의치 않게 된 상황이어서 가수는 “한 많은 보릿고개여 ~”라 목소리로 울고 있는지 모른다.

 아무리 트롯 열풍이라지만, 단군 이래 최고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오늘날 이 노래가 향유되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 노랫말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여 수용하는 일반적 경향에 비추어 볼 때, 젊은 층이 저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렇다. 저 노래가 아니었다면 ‘보릿고개’라는 말조차 사어(死語)가 되었을, 지금은 먹을 것이 넘쳐나는 시대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 노래가 저 역사 속에서 ‘오늘, 여기’로 날아온 엽서라 생각해보는 것이다. 저 힘든 시대에서 21세기 복판으로 날아온 이 엽서를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노래는 ‘뛰지 마라’, ‘울지 마라’는 명령형의 어머니 말을 반복하여 회상한다. 실제 보릿고개를 넘던 옛날의 어머니 말투에 ‘명령’의 강제력이 섞일 힘이나 있었을까만, 힘든 시절을 건너는 지혜를 어머니는 전하고 또 당부했던 것이다. 그 옛날을 노래로 듣는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또 다른 고개를 힘들게 넘고 있다는 것은 육감적으로 알고 있는 것 아닐까? 코로나 19라는 전염병이 지구촌에 창궐하는 현 시대는 분명 저 노랫말 속의 ‘한숨’과 ‘통곡’의 상황이다. 백신이 개발될지라도 코로나19라는 전염병으로부터 우리가 해방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은 끝을 알 수 없는 한숨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그러나 코로나에 어두운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 19로 사람들의 이동이 줄어들고 경제활동을 잠시 멈추자 신기하게도 지구가 살아나고 있다는 코로나의 역설을 우리는 확인하지 않은가. 세밀한 자료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우리에게는 지난봄 미세먼지로부터 고통받은 기억이 별로 없다. 가수가 “아야 뛰지 마라” 노래할 때, 나는 이를 “사람들이여, 욕망을 멈추어라.”로 들어본다. “울지 마라”를 “분노도, 서운함도, 감정을 절제하라.”로 바꾸어 들어본다.

 코로나 19가 인간에 대한 지구 생명체의 저항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는 일이고 보면, 우리는 물질적 욕망을 향한 질주를 조금 더 멈출 필요가 있다. 지구 안에서 인류와 다른 생명들이 공존하고 조화할 때, 우리는 문득 코로나 19라는 보릿고개를 넘어선 우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 거기는 지금보다 더 풍요롭고 더 평화로운 세상 아닐까?

 

 글 = 오창렬 시인 

 ◆오창렬 

 1999년 『시안』 신인상 당선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서로 따뜻하다』 , 『꽃은 자길 봐 주는 사람의 눈 속에서만 핀다』 등. 불꽃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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