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독립운동가 - 광복군 지휘관 채원개 선생
9월의 독립운동가 - 광복군 지휘관 채원개 선생
  • 전북동부보훈지청 제공
  • 승인 2020.08.3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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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곳곳에서 독립전쟁을 치르며 항일 자취를 남기다

채원개 선생은 평안남도 영원 출신으로 의명소학교를 졸업하고 21세에 조선보병대에 입대하여 4년간 복무하면서 군사학을 배웠다. 1919년 고향에서 3·1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으나 탈옥하여 북만주로 이동하는 중에 유하현 삼원포에서 대한독립단 총단장인 조맹선을 만나 대한독립단 군사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겨울 통의부 대표로 김창환·심용준·김이대 등과 함께 상해로 파견되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고, 이후 상해에서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3년 3월 한국노병회 특별회원에 선임되었고, 6월에는 낙양군관학교 기병과에 입학하여 중국 군벌의 내전에 참여하여 실전 경험을 쌓았다. 1925년 봄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 주만 참의부 군무부장에 임명되어 만주지역에 파견되었다.

1930년에는 황포군관학교 교관에서 중국군 59사 작전참모로 전임하였고, 이듬해 봄 제2사 교도단장 등으로 공산당 토벌작전 등에 참가하였다. 1932년 상해사변을 계기로 일본의 대륙 침공이 본격화된 이후 중국군 독립 제4사 참모장으로 근무하였다. 1934년에는 광동 주재 중국군에 복무하면서도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광주에서 중국군으로 재직시 동산백원을 임시정부의 임시청사로 제공하고 아세아 여관을 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들의 숙소로 이용하는 데 기여하였다.

1940년 광복군에 합류하여 참모처장, 1943년 총무처장, 1944년에는 광복군 제1지대장에 임명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광복군 제1지대를 이끌고 남경에 도착하였으나, 당시 미군정이 광복군의 입국을 거절하고, 개인 자격으로 입국만을 허락하여 부대를 해체하고 1946년 상해에서 선편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3주간 훈련을 마친 뒤 제3연대 작전참모로 부임한 이후 제3여단장, 제2사단장을 역임했고 1949년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전북동부보훈지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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