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사랑 기억의 저편
풋사랑 기억의 저편
  • 김종필 동화작가
  • 승인 2020.08.11 15: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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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22>

 노래를 멀리하고 살아 온 내가 최근 ‘7080 가요 모음’ 어플을 스마트폰에 깔았다. 잠이 안 올 때 김정호나 김현식이나 어니언스의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온갖 생각으로 엉켜있던 머리가 소슬 비 내리는 가을밤처럼 가라앉는다. 딱히 슬퍼하거나 외로울 일이 없는데도 시를 읊듯 삶을 관통하는 가인(歌人)들의 음울하면서도 절절한 목소리가 그지없이 좋다.

 홀로 누리는 사치임에도 규칙은 있다. 늘 마지막 곡으로는 어니언스의 ‘편지’다. 잠결에도 따라 부른다. ‘편지’를 따라 부른 지는 참 오래되었다. 별 볼 일 없는 팬이지만 사십 년을 족히 넘겨 사랑하고 있으니 앞뒤 사정이야 어떻든 어니언스는 나로 인해 성공한(?) 가수 생활을 한 셈이다.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음치다. 다른 것은 노력과 시간으로 극복이 가능한데 노래는 영 어렵고 언제나 낯설고 여럿이 모여 돌아가며 불러야 할 때는 크나큰 두려움이다. 내가 처음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자 했을 때 친구들은 놀림 반 걱정 반으로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음악을 어떻게 가르치려고 그래?’ ‘풍금이나 칠 수 있겠어?’ ‘학생들이 네 노래를 듣고 웃으면 어쩌려고?’ 나는 지독한 음치였고 지금도 변함없다.

 노래에 젬병인 내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부르는 노래가 딱 하나 있으니 바로 ‘편지’다. 그나마 음정과 박자를 조금 맞출 수 있는 노래다. 흥을 돋워야 하는 자리인지, 슬퍼해야 하는 자리인지, 어깨 겯고 분노해야 하는 자리인지 가리지 않고 사십 년 넘게 이 노래만 불러왔다. 나도 내가 안타깝다.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신혼여행을 출발할 수 없다는 친구들의 강요에 못 이겨 부른 노래도 이 노래다. 새색시 아내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백년해로를 다짐하는 자리에서 이별의 노래라니.......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 가슴속 울려주는 눈물 젖은 편지

 하얀 종이 위에 곱게 써 내려 간 너의 진실 알아내곤 난 그만 울어버렸네

 멍 뚫린 내 가슴에 서러움이 물 흐르면 떠나버린 너에게 사랑노래 보낸다.”

 ‘편지’에 빠져든 것은 중학생 때 같은 까까머리 친구가 건네준 테이프 덕분이다. 비가 많이 내린 날, 까까머리 친구는 연애상담을 해주겠다며 나를 전주천변으로 불러냈다. 연애 선배라며 연애가 뭔지를 한참 아는 척 가르치더니 ‘편지’를 조용히 불렀다. 노래가 끝난 후 선물이라며 어니언스의 테이프를 주었다. 그 때 친구에게 뭘 배웠는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지만 노랫소리는 시방도 남았다. 노래는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당시 나는 사춘기를 심하게 앓으며 마음을 열어 주지 않는 한 소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내가 유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밤새워 쓴 손 편지에 우표를 붙이는 것 밖에 없었다. 밤마다 편지를 썼고 ‘편지’를 불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답장이 왔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우린 가끔 만나 그저 그런 소소한 얘기를 하면서 풋사랑을 즐겼다. 풋사랑은 달콤했지만 보이지 않는 미래로 인해 늘 불안했다. 긴 기다림 끝에 만나면서도 틀림없이 어른이 되기 전에 헤어짐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 속에 살았다.

 불안한 예감을 이겨내고 싶어 우리는 핑크빛 편지지를 밤새워 채웠고 우표를 붙여 서로에게 보냈다. 하지만 사춘기는 사춘기였다. 내 삶에서 참으로 짧은 시간이었다. 병아리 심장소리 같은 파닥임이었지만 쏜 화살 같은 시간이었다. 불안했던 예감은 너무 빨리 현실이 되었다. 지금은 왜 헤어졌는지, 첫눈 내린 그 날 무슨 일로 심하게 다퉜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집으로 돌아와 눈물 콧물 찍어내며 틀림없이 ‘편지’를 따라 불렀을 것이다.

 첫눈이 폭설이었던 그 날 밤, 나는 소녀에게 백 번 째 편지를 썼다. 마지막 편지였다. 핑크 빛 편지지를 버리고 하얀색 편지지를 택했다. 하지만 끝내 단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백지를 접어 봉투에 넣었고 우표를 붙였다.

 ‘편지’를 알려준 까까머리 친구를 오래 전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내 속을 늘 들여다보는 친구가 물었다. “너 시방도 그 노래밖에 모르지, 나랑 어니언스 임창제 만나러 갈래? 잠언동에서 어니언스라는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고 있어”

 테이프를 준 것처럼 큰 선물이었지만 끝내 내 마음 속의 진짜 가수 임창제를 만나지 못했다. 하필 그 날 무슨 일이 있어 출근하지 못했단다. 생맥주를 벌컥대는 내내 먹먹했다. 떠나간 첫사랑처럼 말이다.

 

글=김종필 동화작가

 

 약력: 문예사조 신인상, 동화집 『아빠와 삼겹살』을 외 4권 발간, 공무원문예대전 대통령상, 참교육문학상, 환경동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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