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독립운동가 -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의 주춧돌을 놓다 - 이석영
8월의 독립운동가 -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의 주춧돌을 놓다 - 이석영
  • 전북동부보훈지청 제공
  • 승인 2020.08.03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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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영 선생

이석영 선생은 1855년 서울에서 아버지 이유승과 어머니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백사 이항복의 후예인 이들 가문은 300여년 동안 8대에 거쳐 정승을 배출한 명문가였으며 이석영 선생은 30세가 되던 해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 막대한 전장(田莊)을 상속받기도 하였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최후를 맞자 같은 해 12월 동생 이회영, 이시영 등 6형제 일가족과 함께 독립군 기지 개척 등 독립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하여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이들은 오로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는 혈성으로 가문 차원에서 집단 망명한 것인데, 이석영의 경제적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도착한 서간도에서 일구어 낸 것이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이다. 경학사는 이석영 선생의 재정적 지원으로 1911년 서간도에 설립된 한인자치 기관으로, 농업개발, 민족교육 군사교육을 실시하여 구국인재를 양성하고 무장항일 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1911년과 1912년 연이은 대흉년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부딪히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선생이 기부한 자금으로 신흥무관학교 전신인 신흥강습소가 설립, 1911년 6월 서간도 삼원포 추가가에서 개교식를 가졌으며 독립군 사관 양성을 위해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신흥강습소가 1912년 신흥학교로 개편되면서 이석영 선생이 교장을 맡았으며, 1920년까지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은 3·1운동 이후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군의 근간을 이루며 혁혁한 전과를 세우면서 독립전쟁사에서 찬란한 자취를 남겼다.

 이렇게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선생은 노후에 끼니조차 잇기 힘든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으며 1934년 상하이 빈민가에서 생을 마쳤다. 독립운동은 집안의 희생과 몰락을 각오하고 나서야만 했던 가시밭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석영의 삶과 자취는 독립운동의 정의와 양심이 무엇인가를 역사에 남긴 표상이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전북동부보훈지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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