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경술국치 110년, 만주로 간 전북인들과 그들의 삶 <7회>‘강제 집단 이주민, 그들은 어떻게 생활 했을까’
[기획] 경술국치 110년, 만주로 간 전북인들과 그들의 삶 <7회>‘강제 집단 이주민, 그들은 어떻게 생활 했을까’
  • 익산=김현주 기자
  • 승인 2020.07.30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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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원광대다이멘션연구단>

 <7회>‘강제 집단 이주민, 그들은 어떻게 생활 했을까’

 이주는 본래 살던 집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처를 옮기게 되었음을 뜻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주와 강제이주는 ‘만주사변’을 경계로 구분된다. 만주사변 이후 강제로 이주한 전북도민에게 만주는 어떠한 곳이었을까.

 ■ 이주와 강제이주의 경계 ‘만주사변’

 만주사변은 만주지역의 정치와 경제, 생활을 변화시킨다. 특히, 조선인의 이주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만주사변은 1931년 9월 18일 일제의 관동군이 중국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류타오후 사건을 일으키며 시작된 전쟁이다.

 일제 관동군은 만주철도선을 폭파하는 자작극을 벌인 후, ‘중국군이 철로를 폭파하고 수비대를 공격했다’라는 구실로 중국군을 공격한다. 이후 일제 관동군은 만주 지역을 신속히 장악한다. 1932년 3월 1일에는 ‘만주국’ 성립을 선언한다.

 사실 만주사변 이전의 조선인 이주는 개인의 자유의지에 결정되었다. 186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조선인의 만주 이주는 1910년 한일병합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독립운동기지로 주목받던 곳이 만주였던 점도 이주 증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이 시기에 만주는 이미 한인사회가 형성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에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후에는 자율과 통제라는 경계선이 형성된다.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정책적 동원의 측면이 강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자의에 의한 이주에서 강제이주로 성격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 만주국 ‘오족협화’와 조선인의 집단마을 형성

 만주국은 일본 관동군이 만주사변으로 점령한 만주 지역에 세운 괴뢰 국가다. 만주국을 수립할 때 내세운 이념은 ‘오족협화(五族協和)’이다. 여기에서 오족은 일본인, 한족(漢族), 만주족, 조선인, 몽골족을 지칭한다.

 오족협화는 다섯 민족이 협력하고 화합해 구미제국주의를 막고 아시아인의 번영을 이루자는 슬로건이다. 그러나 오족협화는 일본이 중심이 되며, 주도권 또한 일본이 가진다는 뜻이 숨어 있다.

 이를 감추기 위해 일본이 오족협화의 긍정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모습에는 조선인 마을도 포함된다. 만주국의 조선인 마을은 다민족의 한 일원으로서 조선인을 위치시키면서, 농사를 지으며 마을에서 함께 생활하는 집단농장의 형태를 제시한다. 이때 조선인의 집단농장은 안전농촌과 집단마을로 나뉜다.

 집단마을은 동양척식회사가 조선총독부로부터 자금과 제반 여건을 지급받는 형식으로 운영된다. 이때 모집의 편의를 위해 지역적 편제를 통한 이주가 시행된다.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전북툰(屯), 정읍툰(屯) 등이 대표적인 지역이다.

 안전농촌은 주로 동아권업이 주체가 되어 설치된 집단농장이다. 안전농촌은 설비해 둔 집에서 지내면서 10년 동안 농사를 지으면 자작농을 만들어준다는 정책으로 조선인을 집단 거주시켰다.

 안전농촌과 집단마을은 조선인을 규합함으로써 치안을 바로 잡음과 동시에 항일무장투쟁세력과 농민의 분리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실행 주체와 설치 지역은 매우 다르다.

 ■ 조선인의 집단이주와 사회적 지위

 만주사변 이듬해에 만주국을 건립한 일제는 조선인을 이주정책이라는 이름으로 강제이주 시킨다. 일본 국내 인구 과잉 문제해결을 위한 집단 이민정책에 실패한 일제가 한반도로 시선을 돌린 결과물이다.

 특히, 선만척식회사를 통해 한반도 남부에 거주하던 농민의 집단 이주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낸다. 이는 만주사변 이전과 이후의 재만 조선인 인구수를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만주국통신사(滿洲國通信社)의 자료는 만주사변과 만주국 설립을 거치면서 얼마나 많은 강제 이주자가 발생했는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1945년 해방 당시에는 한반도에서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이 220만명 정도였다. 이들 이주자는 흑룡강성을 기준으로 남부와 북부에 집중돼 있다.

 만주라는 지역에서 거주하게 된 조선인의 사회적 지위는 어떠했을까. 만주국으로 이주한 조선인은 일본인이었다.

 당시 만주국이 법적으로 국가였으므로, 조선인은 중국인의 차별로부터 자유로워야 했으며,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만주국은 일본 관동군이 지배하는 준식민지에 불과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인은 식민지 종주국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만주국 이전 시기와는 다르게 중국인이 누리는 권리를 누리고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았다. 그런데도 만주국에서의 조선인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식민지배를 받은 조선인일 뿐이었다.

 ■ 사진전문지 ‘만주그래프’에 포착된 조선인의 삶

 ‘만주그래프’는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이하 만철)를 홍보하기 위해 출판한 사진전문 잡지다. 만주그래프는 만주국 홍보처가 정부 대변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 전시·홍보 체제의 부속품으로 활용되기 시작한다.

 즉, 만주의 실상을 보여주겠다는 취지와 무관하게 만주국을 홍보하는 잡지로서 기능하게 된 것이다. 만주그래프는 오족협화의 긍정적인 측면을 선전하면서 조선인 마을을 다룬다.

 이 잡지에는 집단마을보다는 낭만주의 안전농촌의 이미지가 주로 등장한다. 이때 조선인은 대부분 개울에서 빨래하고 절구에 떡을 치는 등 민속적 모습과 공동체 생활을 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조선인이 먼 각도에서 하나의 민속적 혹은 풍속적 이미지로 등장하는 것에 반해, 일본인은 개개인의 얼굴 표정을 명확하게 클로즈업하고 농민의 안락과 영웅적인 이미지를 강조한다.

 당시 만주그래프에 따르면, 조선인은 ‘만주이주 이후 독특한 가옥, 건축양식도 그대로’ 옮겨왔으며, ‘독특한 백의의 의상’과 먹는 음식 등도 조선에서 그대로 옮겨 왔다고 전한다.

 또한, 조선 풍속을 그대로 가져온 조선인의 생활상에도 주목한다. 이 잡지에서 다루고 있는 조선인 가정은 조선 특유의 기와가 드러나는 가옥형태, 칠기로 장식된 집안 내부의 가구,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식사 준비하는 모습 등으로 집약된다.

 만주그래프에 실린 집단마을과 안전농촌의 모습은 농민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급조된 가옥에서 비참하게 지내면서 통제를 받아야 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만주로 강제 이주한 전북인들의 생활

 일제의 감언이설에 속은 전북인들은 고향땅을 버리고 북쪽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만주에 도착한 그들은 만척회사의 삼엄한 관리 속에서 토성을 쌓고 농사를 지어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터전을 마련한다.

 일제는 만주에 이주한 전라북도 사람들에게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좁쌀과 수수쌀, 소금을 공급한다. 그러나 마을을 개척하는 사이에 얼어 죽거나 병들어 죽는 사람, 굶어서 죽는 사람이 많았다.

 처음엔 적응이 되지 않아 고생이 막심했다오. 물이 바뀐데다가 배급주는 식량도 다 썩은 좁쌀뿐이였으니 모두다 병이 안 나겠소? 그때 마을에는 의사도 없었고 아무런 의료보장이 없었지. 병이 나면 송강으로 가야 하는데 돈이 있어야 가지? 그래서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이 많이 죽었다니깐. 1940년도에는 어린아이들이 몰살하다시피 되었소. 새로 낳은 아이들은 모두 죽으나 다름없었다오. 조선에서 낳아 데리고 온 아이들도 많이 죽었소.

 1939년, 전라북도 전주군 삼감리에서 살다가 부모님과 함께 남도툰으로 집단이민을 오게 된 리옥룡은 ‘그때는 정말로 죽지 못해 살았다’고 운을 떼며, 이주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그는 아침이 되면 만척에서 농민들을 토성밖으로 내몰아 일을 시키고는 마을의 대문을 걸어 잠갔다고 말한다. 점심도 집에 들어와서 못 먹는 그 당시의 고단함이 절로 느껴지는 대목이다.

 만주로 이주한 전라북도 사람의 생활은 십진가 ‘이민의 노래’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십진가는 오늘날 어린이들이 부르는 숫자 노래와 비슷하다. 일(1)에서 십(10)까지 숫자에 의미를 부여해 내용을 전달하는 노래이다.

 경쾌한 숫자 노래와는 달리 이민의 노래는 만주로 이주해 와서 고생하던 생활을 반영해 무겁게 느껴진다. 이 노래는 1927년 2월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에서 태어난 정해련이 12살이 됐을 때 남들이 부르는 것을 듣고 배웠다고 한다. 이 노래를 통해 만주로 이주한 전북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기를 바란다.

 하나, 이라면 한평생 좋은 곳을 떨쳐 버리고 떨쳐 버리고 쓸쓸한 북만주에 나 여기 왔네, 나 여기 왔네.

 둘, 이라면 두 다리 부르트게 보따리 지고, 보따리 지고 아장아장 걸어오니 남도툰이라, 남도툰이라.

 서, 이라면 서서 근심 앉아 근심 잔 근심이요, 근심이요. 할 일을 생각하니 잔 근심이요 근심이요.

 너, 이라면 넓다는 소문도 굉장하더니, 굉장하더니 정말로 와서보니 이깔나무 숲 이깔나무 숲.

 다섯, 이라면 다 한 식구를 다려다 놓고 다려다 놓고 어린아이 밥 달라니 과연 슬프다 과연 슬프다.

 여섯, 이라면 여자나 남자나 다 나서 벌어라 다 나서 벌어라 우리들도 장래에 부자가 되자 부자가 되자.

 일곱, 이라면 일가친척 다 버리고 적막한 곳에 적막한 곳에 의식을 따라서 나 여기 왔네, 나 여기 왔네.

 여덟, 이라면 팔자가 기박하여 개척시대라, 개척시대라 비적을 방비하니 고통 심하다 고통 심하다.

 아홉, 이라면 아침저녁 괭이 들고 땅을 파여도 땅을 파여도 아껴 먹는 간냉이 죽도 부족이라네, 부족이라네.

 열, 이라면 열심히 벌어라 우리 농부들 우리 농부들 우리들도 장래에 고향 가보자 고향 가보자!

 
 <인터뷰> 박성호 연구교수

“중국땅으로 이주한 한인들이 고향에 가볼 수 있기를”

 일제의 감언이설에 속아 전라북도에서 만주로 이주한 사람은 주로 만주 집단이민의 중심 현이었던 안도현에 배치되었습니다. ‘이민의 노래’를 들려주시며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만주에서 생을 마감한 정해련 어르신을 생각합니다.

 “장래에 고향 가보자”했던 노랫말이 아른거립니다.

 해방 직후 중국에 거주하던 한인 220여만명 중에 절반이 귀환하고 나머지는 중국에서 뿌리를 내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중국에서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모든 이주민이 대한민국 고향으로 가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익산=김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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