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독립운동가 - 미주 한인사회 부인운동의 개척자 강혜원 선생
7월의 독립운동가 - 미주 한인사회 부인운동의 개척자 강혜원 선생
  • 전북동부보훈지청
  • 승인 2020.07.06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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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선생은 1885년 11월 21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자녀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 황마리아를 따라 1905년 5월 하와이로 이주하였고, 1913년 4월 어머니와 함께 호놀룰루 대한인부인회를 조직하면서 한인부인운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1만세 후 많은 여성들이 조국에서 희생되었다는 것을 전해듣고는 우리 미주 여성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였고, 이즈음 미주 한인의 최고기관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安昌浩)가 3.1운동과 임시정부 후원을 위해 미주 각지의 한인사회를 순방하면서 ‘여성들도 조국의 광복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하지 않느냐’고 조언하자 1919년 3월 25일부터 30일까지 올케 강원신을 비롯하여 한성선(韓成善, 본명 文成善), 한영숙(韓永淑), 한신애(韓信愛), 김경애 등과 1주일 동안 협의한 끝에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후원하게 되었다.

 이후 선생은 미국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부인회의 역량을 하나로 합치기 위해 부인회를 통합하였고 1919년 8월 2일 대한여자애국단이 창립되면서, 총단장 겸 총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0년 2월 대한여자애국단 초대 총단장으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통해 군자금 500달러를 임시정부에 전달했으며 그해 4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강영소가 선생에게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재정 후원을 부탁하자, 선생은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 명의로 「대한여자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의연금을 모집했다. 선생은 시간당 15센트씩 벌면서도 매월 3달러씩 단비(團費)를 냈으며 이렇게 모은 돈으로 대한여자애국단 단원들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후원금을 송금했다. 아울러, 미주내 한인 동포 자녀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운동을 실시하는 등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해방 이후에는 재미한인전후구제회(在美韓人戰後救濟會)와 함께 본국에 구제품을 보내기도 하였다. 

 선생은 1982년 5월 31일 별세했으며, 로스앤젤레스 로즈데일(Rosedale) 공동묘지에 묻혀 계시다가 2016년에 남편과 함께 유해 봉환되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강혜원 선생의 가족 모두가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어머니 황마리아 선생은 하와이 한인사회 여성운동의 선구자로서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남편 김성권 선생은 하와이 한인단체, 한인합성협회와 흥사단 등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으며, 동생 강영승 선생은 대한인국민회, 신한민보 등에서 민족운동에 헌신하여 2016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올케 강원신 선생은 강혜원 선생과 함께 한인사회 부인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전북동부보훈지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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