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인들의 첫 번째 만주 이주
전북인들의 첫 번째 만주 이주
  • 익산=김현주 기자
  • 승인 2020.06.18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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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9월, 만주사변 직후 이동하는 일본군

 ■‘3·1운동 주역 천도교’ 보수와 혁신의 갈림길에 서다

  3·1운동의 결과 일제는 무단통치의 한계를 절감하고 새롭게 문화정치를 시작한다.

 문화정치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제한적이나마 단체를 조직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러시아 혁명 이후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와 사회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한반도에도 새로운 사상이 유입됐다. 청년들은 사회변혁을 꿈꾸며 여러 단체를 조직했다. 전북지역에서도 타지역과 마찬가지로 청년단체의 설립은 활발하게 진행됐다. 그 중심에는 천도교가 있었다.

 1920년 4월 순창, 임실, 금구, 진안, 정읍, 고산, 익산 등 7개 지역에 천도교청년회 지회가 설립됐으며, 뒤를 이어 전주, 김제, 옥구 등 3개 지역에 지회가 설립됐다. 그중 돋보이는 지역은 익산이었다. 익산은 1920년대 당시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 세력이 강성했던 지역으로 기록돼 있다. 1926년 익산지방을 소개하는 ‘동아일보’ 기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전했다.

 “천도교는 4~5년 전까지는 (전북)제일의 세력이었다. 익산군이 전북 천도교의 총본영이 되어 총 교인이 20,000여 명을 넘었으며, 이리에 수만원의 거액을 투자하여 굉장한 회당을 건축하고 한참 때는 위풍이 서릿발 치듯 하였다”

 1920년대 중반 통계자료를 살펴보면 익산의 인구는 약 1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전체인구의 약 20%가 천도교도였던 것이다. 당시 익산의 천도교는 고창 출신(익산출신이라는 기록이 있음)의 오지영(吳知泳 1868~1950)을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 계열의 혁신파 세력이 주도했다.

 먼저 오지영이라는 인물을 보면,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1920년대 천도교 교단의 신문화운동에 반발하여 천도교의 ‘혁신’을 주장하며 혁신운동에 돌입한 인물이기도 했다.

 신문화운동은 3?1운동 이후 심해진 일제의 탄압에 대응하고자 천도교 교단의 정비를 위한 움직임이었다. 신문화운동의 핵심세력은 일본 유학파였다. 이들은 자유주의적 사상으로 무장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반발한 세력들이 혁신운동을 감행하게 됐다.

 혁신운동은 절대평등과 계급타파를 내세우며 천도교 교단의 개혁을 주장했다. 오지영 외에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의 아들 최동희(崔東曦 1890~1927)도 혁신운동에 참여했다.

 천도교 혁신운동은 1921년 실패로 끝나고 마는데, 이들의 주장이 사회주의적 색채를 띤다 하여 일제와 천도교 신파세력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곧 이들은 기존 교단에서 벗어나고자 독자적으로 ‘천도교 연합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천도교 연합회 핵심인물인 오지영.

 ■오지영, 전북인들의 첫 번째 만주 집단 이주를 이끌다

 천도교 연합회는 국내의 천도교단을 장악한 천도교 신파세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이들은 전라도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세력기반은 약했다. 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지자 이들의 눈에 띈 지역은 만주였다. 그곳으로 이주해 포교활동을 전개하고 자신들만의 세력기반을 얻으려 했다.

 일본 유학 시절 사회주의론 강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최동희는 만주 지역의 사회주의 사상에 기반을 둔 독립운동가들과 일찍부터 교류하고 있었다. 최동희는 만주에서 천도교와 공산주의 사상을 연결해 혁명운동을 전개하려 했다. 이러한 최동희의 노력은 곧 결실을 맺게 되는데, 이는 곧 ‘고려혁명당’의 결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만주 이주 운동은 천도교 연합회와 고려혁명당의 주도로 시작됐다. 이주는 1925년 1월부터 1926년 3월까지 1년 2개월간 진행됐다. 길림성 화전현(樺甸縣)에 이주했는데 오지영이 인솔에 앞장섰다. 특히, 1926년 3월 오지영이 익산지역의 천도교 연합회원에게 편지를 보내 ‘만주가 살기 좋으니 이주하라’고 권유했다.

 서신을 전달받은 익산지역의 천도교 연합회원 230여명은 같은 해 3월 23일 이리에서 출발해 중국 길림에 도착했다. 그렇다면 익산지역에서 만주로 이주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와 관련된 내용은 1926년 9월 9일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본인 등은 본래 무산 농민인 동시에 경작지가 전무함으로 부득이 다정한 고국을 등지고 쓸쓸한 북만주로 이주하게 된 동기는 본 (천도교) 연합회의 주선으로 중국인의 토지와 가옥을 임차하고 200여명의 일단이 이주하게 된…(후략)”

 위 기사로 미루어 짐작할 때 익산에서 만주로 이주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농민계층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천도교 연합회원이 강세였던 전라도, 천도교 연합회의 핵심인물 중 하나였던 오지영, 오지영의 지역기반인 익산, 이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익산지역 천도교 연합회원들의 만주 이주는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이주 후 공동농장을 설립하고 마을을 천도교 연합회의 이념과 고려혁명당의 공산주의 실현을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중국인에게 임차한 토지를 마을 거주인원, 연령 등을 고려해 균등하게 분배했다.

 또한, 마을별로 한 가정처럼 생활하고 토지를 공동으로 점유하고 공동 경작했다. 즉 이들은 조선에서 좌절된 ‘계급타파, 국토 평균 분작’ 등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만주에서 실현하려 했다.

 하지만, 집단촌락은 오래가지 못했다. 천도교 연합회의 핵심인물인 최동희가 1927년 폐병으로 사망했다. 고려혁명당의 주요 간부들이 일제에 의해 대거 체포됨으로써 조직이 와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오지영이 꿈꾸었던 공동농장 운영은 좌절됐고, 결국 모든 것을 정리하고 국내로 다시 돌아오게 됐다.

 ■‘만주의 우리 동포를 탄압하지 마라’

 전북지역 내 천도교 연합회 세력들의 만주 공동농장이 실패로 끝난 후, 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사건을 살펴보기에 앞서 당시 중국과 일본의 관계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일본은 끊임없이 만주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다.

 만주로 이주하는 조선인이 갈수록 증가하자 당시 중국인들은 일본이 만주 점령을 위해 조선인을 이용한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만주 지역에 기반을 둔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점점 고조되면서 중국인들의 불안감이 점차 높아져 갔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일본에 직접적인 대응 대신 만주의 조선인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봉천성을 공격하는 일본군

 1927년 10월 전후로 봉천성(奉天省)에서는 “이주 조선인을 몰아내고, 귀화희망자는 국적법에 따라 귀화시키며, 법을 어기면 즉시 귀화를 취소하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이밖에도 농사와 거주 방해, 폭행, 토지계약의 일방적 파기 등의 압박이 가해졌다. 이러한 실상이 언론사를 통해 보도됐고, 조선에서는 ‘재만동포옹호동맹’이 결성된다.

 재만동포옹호동맹은 전국 각지의 청년회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는데, 조직의 핵심은 신간회 지부와 관련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곧 만주 조선인의 박해에 항의하기 시작했다.

 1927년 12월 7일, 전북지역에서는 이리(지금의 익산)에서 최초로 동맹 조직결성대회가 열렸지만 경찰에 의해 해산됐다. 그러나 그날 저녁부터 현재 인화동에 위치한 중국인 상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이 ‘조선일보’에서 보도됐는데 사건은 최초에 어린아이들이 소동을 일으키다가 청년 수백여명 이 이에 동조하며 중국인 상점을 공격했다고 전해졌다.

 그때의 사건을 기억하는 화교를 만날 수 있었다. 익산에 거주 중인 화교 2세대인 유비택(1947년생) 씨의 아버지는 1927년 이리 화교사건의 피해자다. 유비택 씨는 아버지가 이야기했던 내용을 기억하며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우리 아버지는 1909년 산둥 옌타이 출신인데 15살 때 이리(익산)에 넘어왔어. 우리 아버지 청년 시절에 중국에서 중국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을 많이 때리니까 조선 사람들이 그 원수를 갚으려고 한국에 있는 중국 사람들한테 복수한 거지. 그때 우리 아버지가 이 두 개가 빠졌어. 막대기로 때려서 이빨이 빠졌는데 나한테 보여줬어. 그리고 금이빨로 했지. 아버지 말로는 그때 이리에서 크게 화교사건이 터졌데.”

 이날 일어난 사건은 주변 지역으로까지 번지는데, 12월 8일과 9일에는 군산, 전주, 김제, 서천 등지로 퍼졌다. 10일에는 또다시 군산, 함열, 이리, 장성, 부안, 김제, 삼례, 강경, 서천에서 일어나면서 중국인 상점의 부서지고 구타로 부상당한 중국인들이 속출했다.

 군산의 경우 10일 재차 발생한 폭동에서 1,000여 명의 조선인이 “중국인을 모두 죽여라”며 중국인 상점을 포위하고 공격할 정도로 심각했다. 폭동은 전북을 넘어 전국적으로 확대됐으며, 그해 12월 27일까지 이어졌다.

 폭동의 피해는 경기지역 화교들이 가장 심했다. 그다음으로 피해규모가 큰 지역은 전북지역이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조사결과를 보면 이 기간에 전북에서는 100건의 소요사태가 있었다.

 중국인 폭행, 상점 습격 등이었는데, 피해자는 총 54명이었으며, 이중 2명은 폭행으로 사망했다. 사실 일제는 ‘화교배척사건’이 발생했을 때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만주 지역의 이권 확보를 위해서 조선인과 중국인 간의 갈등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건이 점차 유혈사태로 이어지고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자 폭동이 민족운동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각 지역의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간부들을 체포하고, 집회를 금지하면서 사태는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사태는 진정됐지만 민족 간 갈등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1931년 다시 한 번 화교배척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1931년 7월 3일 인천에서 시작된 폭동은 북부로 번져나갔고 평양에서는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 7월 6일까지 벌어진 학살극은 경찰의 진압으로 마무리됐다.

 이 시위로 평양에서만 2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중국 언론에서는 ‘평양의 대도살’이라 할 정도로 중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두 차례의 화교배척사건은 만주라는 공간을 매개로 발생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만주 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일본, 만주침략의 선봉에 조선인이 있다고 생각한 중국, 일제의 수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만주로 떠난 조선인. 이러한 기묘한 삼각관계는 민족 간 갈등을 촉발했고, 결국은 만주사변으로 이어지게 된다. 

 ■<인터뷰>이명진 연구원 “일본은 만주의 조선인들을 이용했다”

 당시 만주 지역에서는 한-중-일 세 국가는 기묘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인들에게 만주는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해 떠난 독립투사들과 일본인 지주들의 등쌀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난 농민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만주 침략을 위한 도구로서 만주의 조선인들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일본은 만주의 조선인들과 중국인의 갈등을 의도적으로 방임하였습니다. 중국은 일본에 대항하지 못하고 만주의 조선인들을 핍박했죠. 만주의 조선인들은 중국과 일본의 이권 다툼의 희생자로 볼 수 있습니다. 조국을 떠나 중국인도, 일본인도 아니었던 당시 조선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익산=김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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