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냇저고리, 어머니의 깊고 넓은 사랑
배냇저고리, 어머니의 깊고 넓은 사랑
  • 임정수
  • 승인 2020.05.10 1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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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이른 아침의 일입니다.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난 내게 아내는 불쑥 보자기를 건넸습니다. 한눈에 봐도 정성스럽게 싼 보자기였습니다. 조심스럽게 풀어헤치자 누런 아이 삼베옷이 나왔습니다. 빛바랜 정도를 보아하니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군데군데 헤진 곳이 있고 또 색은 본래 빛을 잃고 희미한 검푸른 색도 보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삼베옷은 다름 아닌 갓난아기 배냇저고리였습니다. 아내 말은 이렇습니다. 지난 8일 어버이날을 앞두고 전주 어머니댁에 갔는데, 어머니께서 주셨다는 겁니다. 어머니는 “아범이 갓난아기 때 입던 옷이다. 이제는 네가 보관하라”고 하셨답니다. 덧붙여 그 배냇저고리는 수년 전 돌아가신 큰어머니께서 지은 옷이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잠에서 덜 깨어 몽롱했지만 둔탁한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집 밖을 나와 아파트 모서리 벤치에 앉아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지난 시간을 떠올렸습니다. 그러자 크고 작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우선,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또렷하게 떠올랐습니다. 이어 신혼 초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김제 큰아버지 댁에서 신세를 졌다는 어머님께 들은 이야기, 그리고 이듬해 전주 모래네로 이사와 살았다는 이야기가 스쳐갔습니다. 모래네는 중1인가 중2까지 동생 셋과 함께 온 가족이 방 한 칸에 살았던 어려웠던 시절의 터전입니다. 가난의 천근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지만 부모님의 헌신에 힘입어 네 형제는 모두 대학을 마치고 직장을 얻었습니다. 무척이나 기뻐하셨던 아버지, 어머님 얼굴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부끄러운 추억도 살포시 떠오릅니다. 아마, 초등학교 때의 일일 것입니다. 인근 밭일을 다녀오신 어머니는 새참으로 나온 빵을 먹지 않고 가져와 우리 형제에게 건넸습니다. 철없던 우리 형제는 빵을 맛있게 먹어치우고, 다시 어머니가 밭일을 가시기만을 바랬습니다. 빵 욕심 때문입니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께서도 허기지셨을 텐데, 배고픈 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빵을 먹고 싶으셨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심지어 죄책감마저 듭니다. 지금도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을 생각하면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곤 합니다.

 제가 최근 경제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을 때, 어머니께서는 동생들 모르게 한 푼 한 푼 모아두신 쌈짓돈을 슬그머니 건네 주셨습니다. 그래도 LH 직장을 다니니 먹고 살만한 데도, 장남이 힘을 내야 한다고 하시면서요. 가슴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자식이 뭐라고….

 솔직히, 어머니께서 저의 배냇저고리를 60년 가까이 보관하신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것을 건네받기 전까지 감히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하루하루 풀칠하기도 힘들었던 시절, 어머니께서 그것을 그토록 소중하게 챙기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그토록 넓고 깊은데, 저는 환갑이 코앞임에도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왜 우리는 가난할까?” 하며 부모님 원망도 많이 했고, 직장에 들어와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이번 어버이날 역시 안부를 여쭈려 방문하기는커녕 되레 어머니께서 주신 전화로 대신했습니다.

 세상에는 귀하고 소중한 게 많습니다. 그렇다 해도 뭔가를 60년 가까이 신줏단지 모시듯 소중히 간직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값도 안 나가는 배냇저고리를 넉넉지 않은 형편에, 이사도 수없이 많이 했는데, 그리 오랫동안 갖고 계시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한참 동안 가슴 한쪽에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밀려오는 것을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지금도 어머니가 그 옷을 오랫동안 갖고 계신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왜 지금에서야 주셨는지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 먼저 이야기하지 않으시면 굳이 물어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순이 곧 다가오는 철없는 자식은 자신의 또 다른 분신인 배냇저고리를 볼 때마다 60년 가까이 소중히 간직하신 어머니 마음을 가슴 깊숙이 고이고이 간직하려 합니다.

임정수 <LH AMC지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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