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최후승리 (9-完)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최후승리 (9-完)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4.10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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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관음포해전서 영웅 잠들다

  中路軍은 9월17일 가장 먼저 사천성(泗川城) 공격에 나섰으나 일진퇴를 거듭한 끝에 10월1일 총공격을 감행했다가 대패, 참장 이녕(李寧)이 전사하고 3천여 병력의 손실을 입었으며 합천-성주로 퇴각했다가 11월15일 도진의홍군이 스스로 철수한뒤 17일에 입성했다.

 남해안일대 일본군에서는 이미 본국으로의 총퇴각령이 내려져 있었다. 부산의 일본군은 11월11일부터 철수가 시작되었으나 조선수군의 퇴로차단으로 順天 왜교성 소서행장군의 철퇴가 늦어지자 도진의홍 입화통호 등이 일본 수군 1만2천여명을 3백여척의 전선에 나눠 태우고 구원차 출동했다.

 이로써 朝日전쟁 7년 최후의 대규모 전투로 조선 최후의 승리를 장식한 노량(露粱)해전의 막이 오르게 됐다.

 19일 새벽 일본수군이 남해도(南海島)와 노량진(露粱津) 사이 좁은 해협을 뒤덮으며 나타나 앞서 18일 밤 묘도(描島)를 떠나 대기하고 있던 이순신과 진린의 朝明 연합함대와 맞닥뜨렸다.

 이때 연합함대의 규모는 재건된 이순신 함대의 전선 85척 병력 1만6천여명과 진린함대 소규모 전선 63척과 병력 2천6백여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明 수군은 앞서 10월3일 돼교성에 대한 朝明 연합군 수륙합동 공격전에서 사선 19척 호선 20척을 잃고 군사 2천5백여명이 전사하는 큰 손해를 입었었다.

 明軍제독 유정과 수군 도독 진린은 소서행장이 수많은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간청하자 이를 들어주기로 했다가 이순신의 단호한 거절로 마지못해 참전했었다.

 이순신은 적 수군이 노량해협을 통과하여 관음포(觀音浦)앞 바다에 이르자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정오까지 계속된 이 海戰에서 이순신 함대는 일본수군 전함 2백여척을 깨뜨렸으나 이순신이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조선의 구원을 위해 마치 하늘이 보낸듯, 개전 1년전에 전라좌수사가 되어 조선수군을 세계 최강으로 키웠고 전쟁이 일어나자 세계해전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탁월한 전략으로 무패전승의 기록으로 전후 두차례 풍신수길의 주륙병진 기도를 좌절시켜 조선에 최후 승리를 안겨준뒤 7년전쟁 최후의 전투에서 신화처럼 사라져간 이순신의 죽음은 영원히 역사에 남는 의문의 아닐 수 없다.

 그의 죽음은 전사로 기록되고 있으나 그의 죽음을 전후로 한 모든 상황은 그가 자살한 것으로 보는게 훨씬 합당하다.

 그는 독전중 유탄에 맞은 것으로 되어있으나 숱한 해전을 지휘한 그가 유탄에 맞은 만큼 방비를 소홀할 까닭이 없었다. 그가 죽음을 결심하고 스스로 방패를 거두고 적탄에 몸을 노출시켰으리라는 추정이다.

 그는 죽음을 결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전쟁중에서도 모함과 격심한 당쟁에 휘말려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종전이 다가서고 있을 무렵, 그는 천거한 영의정 유성룡이 파직직전에 몰려있었다. 전쟁이 끝난뒤 그가 살아남아 있다가는 당쟁의 제물이 되어 역적의 누명을 쓰게 될 것이고 그 자신뿐 아니라 일가를 비극으로 몰아 넣게 되리라는 것을 그가 모를리가 없었다.

 朝日전쟁의 두영웅은 석달을 사이에 두고 종전과 함께 이렇게 사라져 갔다. 다만 풍신수길은 病死로 일본에 패전고 함께 자신과 일가의 몰락을 남겼고 이순신은 전사를 가장한 자살로 조선에 승전과 함께 자신과 일가의 영예를 남겼다.

 순천 왜교성의 소서행장군은 묘도(描島)에서 퇴로를 봉새하고 있던 조선 수군이 노량해전에 출동한 틈을 타서 5백여척의 배에 나눠타고 남해도를 돌아 부산에 도착했으며 26일까지 일본침공군 전군이 조선에서 철군을 완료함으로써 7년전쟁은 마침내 그 막을 내렸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9월2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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