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최후승리 (7)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최후승리 (7)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4.06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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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조선수군 재건과 울산성 포위 공격
울산성(도산성 전투도) / 일본 나고야성 박물관에 소장

수 만명의 조선 백성들의 해협의 양쪽 높은 산위에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신화처럼 대승을 거둔 이순신을 그로부터 41일간 서해 연안을 따라 북상하여 전라도 부안의 위도(蝟島)를 거쳐 멀리 금강(錦江)하구의 고군산열도(古群山列島)까지 올라갔다가 뱃머리를 돌려 변산반도(邊山半島)연안을 따라 다시 내려와 10월29일 영산강(榮山江)하구의 보화도(寶花島:木浦 앞바다)에 기지를 건설하고 수군재건에 전력을 다했다.

 1천여리가 넘는 순항도중에 이순신 함대는 법성포(法聖浦)와 우수영(右水營)에도 들러 일본군이 짓밟고 지나간뒤의 참담한 폐허를 보았다. 이순신은 13척의 소규모 선단으로 대규모의 적수군을 만나 다시 싸우는 것은 무모하다고 판단, 서해 일대의 경비에 나서는 한편 수군재건의 여러가지 구상을 했던 것 같다.

 보화도는 영산강 하구 목포 앞바다에 떠있는 길이 3km, 폭 120m~800m의 작은 섬이나 해상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순신은 여기서 전력을 다해 전선 29척을 새로 만들어 함대는 42척에 수군 8천여명이 되었다.

 각종 화포를 주조하였으며 일대의 바다를 통행하는 배에 통행(通行)첩을 발행해 주고 군량을 거두어 2만여 섬을 모았다.

 소금을 구어 팔아 전비를 조달키로 했다. 그무렵 이순신을 따르는 피난민들이 무려 15만 여명이나 됐으며 이들은 300여 척의 배에 타고 서해연안을 떠돌아 다녔다. 요즘 시대말로 boat people이었다. 이들이 조선수군 재건의 바탕이었다.

 1598년 2월18일 기지를 완도고금도(莞島古今島)로 옮겼다. 고금도는 길이 21km에 폭이 11km나 되는 큰 섬이었다. 이 섬으로부터 소서행장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順天의 왜교(倭橋=예교曳橋)까지는 불과 140km. 그는 공격진지로 전진한 것이었다.

 여기서 이순신은 다시 전선 43척을 새로 만들어 함대규모는 85척, 군사 1만6천명으로 증강되었다.

 이순신의 수군재건은 1598년 7월16일까지 계속되었다. 이날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사선(沙船:승무원 100명) 25척 호선(號船 승무원 30명) 77척에 기타 연락선 26척 등에 병력 6천여명이었다.

 조선수군 전함은 물론 일본수군 전함에 비해서도 크기가 몹시 작아 이들은 실전에 참여하지 못하고 구경만 하면서도 횡포가 심해 이들 뒷바라지에 이순신은 더이상 수군증강을 꾀하지 못했다.

 한편 조선수군의 기적같은 명량(鳴梁)해전 승리와 재건으로 풍신수길의 2차 수륙병진책이 좌절되고 때마침 명군이 직산(稷山)전투 승리가 이어지면서 일본군의 1차전쟁때와 같이 부산일대 12本城 6支城의 倭城으로 급거 퇴각, 방어군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1597년 12우러까지 일본군은 왜성들의 수축과 방어태세에 전력을 다했으며 明軍은 대부분이 경상도로 진출, 조선군과 연합하여 공격준비에 전력을 다했다.

 12월22일 朝明연합군의 울산성(蔚山城)의 일본군 가등청정군에 대규모 장기간의 공격을 개시했다.

 조선군은 도원수 권율휘하 경상 좌병사 고언백(高彦伯) 경상 우병사 정기용(鄭起龍) 충청병사 이시언(李時言) 등이 거느린 1만명, 명군은 경리(經理) 양호(楊鎬)제독 마귀(麻貴)휘하 이방춘(李芳春) 오유충(吳惟衷) 고책(高策) 등이 거느린 3만8천명 등 모두 4만8천여명이 참전했고 일본군은 가등청정군 1만6천여명이 사수전을 폈다.

 蔚山城은 울산읍 동쪽 1km지점에 솟아오른 島山에 3개의 本城을 쌓았는데 길이가 1,300여m, 높이가 10~15m에 이르는 요새였다. 외고가에는 2,400여m에 이르는 토제(土堤)를 쌓았으며 남쪽은 태화강(太和江)이 천험을 이룰뿐아니라 배가 직접 성밑까지 닿을수 있어 해로와 연결되었다.

 울산성은 가등청정군 휘하의 왜성이었으나 가등청정군 주력을 인근 서생포성(西生浦城)에 있었고 울산성에는 모리수원(毛利秀元)군 1만여 명이 성 수축공사에 동원되었다가 공사가 끝나 다음달 가등청정군과 교대할 예정으로 있었으며 군량 등은 이미 배에 실어 보낸 뒤었다.

 연합군의 맹렬한 공격에도 일본군의 천험을 이용하여 결사적으로 성을 지켰다. 전투가 시작되면서 가등청정이 서생포에서 달려와 전투를 지휘했으나 수성전이 장기화되면서 군량이 떨어져 벽토(壁土)를 끓여 먹고 물이 겨 말을 잡아 피를 마시거나 오줌을 마시는 궁지로 몰렸으며 혹독한 추위로 얼어죽는 병사들이 속출하는 참담한 항전이 계속되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9월2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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