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최후승리 (8)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최후승리 (8)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4.08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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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臣秀吉 사망후 일본군 철수 시작
울산성 전투도 / 북촌미술관 제공
울산성 전투도 / 북촌미술관 제공

  서생포의 가등청준군이 구원군으로 태화강까지 진출했으나 연합군의 차단으로 상륙하지 못한채 울산성의 일본군이 고립무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해가 바뀌어 2차전쟁 발발 첫해 1597년 丁酉年 宣祖30년이 저물고 朝日전쟁 최후의 해 1598년 戊戌年 宣祖31년이 밝았다.

 전투가 장기화되면서 공격군쪽에도 희생자가 늘고 사기가 전하되어 갔다. 새해가 되면서 일본군의 구원출동이 본격화되여 양산성(梁山城) 흑전장정 봉수하가정군 2,800명이 울산성 근처까지 진출했고, 멀리 전라도 順天倭城에서 출진한 소서행장군 2천명이 태화강에 나타났으며 우희다수가 모리수원의 2만병력이 울산 10리 전방에 출현, 연합군을 역포위하기 시작했다.

 4일 연합군 최후의 총공격이 강행됐으나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이날 마침내 총퇴각을 결행했다.

 울산성 전투의 명군 손실은 전사 1천여명, 부상 3천여명이었으며 慶州에 집결된 조선군은 800여명에 그쳤다. 일본군 손실은 밝혀진게 없으나 전투임무를 계속할 수 있는 병력은 ‘수백명’에 불과했다.

 울산성 공방전 이후에도 朝明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는 국지전이 계속됐다. 3월24일 합천(陜川)인근 삼가(三嘉)현에서 경강 우병사 정기룡(鄭起龍) 명군 부총병 해생(解生)의 3천명과 일본 도진의홍(島津義弘)군 2천명이, 4월8일에는 전라도 茂朱에서 전라병사 이광악(李光岳)의 5천 조선군과 명군 참장 이녕(李寧)의 500명 연합군이 도진 의홍군 300명과 그리고 4월20일에는 정기룡과 이령군 2천명이 역시 도진의홍군과 함양(咸陽)에서 충돌했다.

 7월18일 일본수군 백여척이 녹도를 침범하자 이순신 함대가 출동, 절이도(고흥군) 앞바다에서 요격하여 그중 50여척을 불태웠다. 이때 진린의 明수군은 뒤에 처져 관전하다가 전투가 끝나자 적의 목을 빼앗아 전공을 가로채는데 급급했다. 적의 시체가 바다에 가득 찼다.

 8월17일, 미천한 몸을 일으켜 일본천하를 통일하고 일본 역사상 최초의 대륙진출을 꾀하여 7년간 대군으로 조선을 침공, 문명 선진국 조선과 명국 연합군과 국제전을 벌여 근대사의 여명이 시작되는 16세기 동아시아 천지를 진동시킨 불세출의 일본국 영웅 豊臣秀吉이 大阪城(오사카성)내 복견성(伏見城)에서 62세를 일기로 병으로 죽었다.

 그는 일본에 통일국가를 남겼고 영원한 군국 일본의 전통을 남겼으나 한 인간으로서는 6세의 아들만을 남겨 그가 평생을 싸워 전취한 정권은 곧이어 정적 덕천가강(德川家康)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극비에 부쳐졌고, 일본조정의 重臣들인 5大老회의가 조선출정군의 전면 철군을 결정하고 이 결정을 침공군 장령들에 극비로 지시했다.

 그러나 수길의 죽음은 뜬 소문처럼 朝明연합군에까지 번졌고 조선 조정의 귀에도 들리기 시작했다.

 9월에 접어들어 朝明연합구는 전군을 동원, 東西와 中路 그리고 水路의 4방면에서 남해안 일대 일본군 주요거점에 대해 총공격을 감행키로 했다.

 東路軍은 별장 김응서(金應瑞)휘하 조선군 5,500명 제독 마귀(麻貴) 부총병 오유충(吳惟衷) 휘하 明軍 2만4천명 모두 2만9천명으로 편성되어 가등청정 흑전장정 휘하 이본군 1만5천명이 지키고 있는 蔚山城을 다시 공격하고 西路軍은 도원수 權慄휘하 2만2천명 제독 유정 부총병 이방춘(李芳春)휘하 明軍 1만4천명명 모두 3만6천명으로 편성되어 소서행장 휘하 일본군 1만3천7백명이 지키고 있는 順天의 왜교성(倭橋城)을 공격하며 中路軍은 경상우병사 정기룡(鄭起龍)휘하 조선군 2천2백명 제독 동일원(董一元) 부총병 장방(張榜)휘하 명군 3만4천5백명 모두 3만6천7백명으로 편성되어 도진의홍 휘하 일본군 8천명이 지키고 있는 사천성(泗川城)을 공격했다.

 水路軍은 통제사 李舜臣휘하 조선수군 8천2백명 수군 도독 진린휘하 明수군 6천명 모두 1만4천2백명으로 편성되어 西路軍과 수륙에서 협동작전을 폈다.

 東路軍 공격은 22일 시작되어 25일까지 격전을 치른 끝에 조선군 별장 김응서가 동래성(東萊城)을 점령, 부산으로부터의 응원군 출동을 차단하는데 성공했으나 울산성은 끝내 점령하지 못하고 있다가 11월18일 가등청정군이 울산성에서 스스로 퇴각한뒤 비로서 점령에 성공했다.

 西路軍은 左右中協으로 나누어 全州를 출발, 곡성(谷城) 구례(求禮) 순창(淳昌)을 거쳐 선봉이 19일 왜교성 공격에 들어갔으며 10월24일까지 지루한 공방전이 거듭되었다. 10월초 명군이 일시 철수했으나 이날 조서행장군이 스스로 철수한뒤 연합군이 입성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9월2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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