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태극선) 기능보유자 방화선 장인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태극선) 기능보유자 방화선 장인
  • 고영승 기자
  • 승인 2020.02.24 17: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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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혼 名人 名家를 찾아서>
방화선 선자장
방화선 선자장

 전주는 부채의 산지로 유명하다. 그 이유는 뛰어난 품질의 종이와 대나무 생산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임금님에게 진상할 부채를 만드는 선자청이 전주에 생긴 이후 선자장들이 모여들며 공방을 형성했다. 이들은 재료 공급부터 부채 납품 및 수급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며 좋은 품질의 부채를 만드는데 피와 땀을 흘렸다.

 부채의 ‘부’는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킨다, ‘채’는 가는 대나무 또는 도구를 의미한다. 즉,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라는 뜻이다. 한자로는 ‘선자扇子’라고 하며, 부채를 만드는 장인을 ‘선자장扇子匠’이라 부른다.

 예전부터 부채는 무더운 여름을 대비해 기온이 습해지기 시작하는 ‘하지’ 전까지만 만들던 생활소품이었다. 그러나 선풍기의 보급 등으로 점점 수요가 줄고있으며, 제작을 중단하는 부채 장인들은 늘고 있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2대째 잇고 있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태극선) 기능보유자 방화선(64) 장인은 꿋꿋하게 우리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대나무를 깎고, 살을 놓고, 한지를 붙이고, 오리기를 한 지 50년이 지났지만 그는 아직도 옛날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 찔리고 곪기가 일수지만 그래도 부채를 만질 때가 가장 마음 편하다는 그는 스스로를 ‘부채중독자’라 말한다.

 그에게 부채는 삶 그 자체다. 어릴 때부터 부채를 만들었다. 대한민국 명장이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1호였던 아버지 故방춘근씨는 자식들에게 매일매일 부채 만들기를 숙제로 내줬으며, 부채 숙제가 끝내야만 학교 숙제를 하게 했다.

 부채를 만지라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짜증도 냈으나, 어린 방화선은 살을 제법 잘 넣었고, 매듭 끝을 잘 묶는 등 부채 만들기에 재능을 보였다. 유년 시절 그에게 부채 작업장은 놀이터였고 부채만이 제일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이였다.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나 둘은 그렇게 서로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어릴 적 그의 집은 100여 명이 넘는 부채 일꾼이 밤낮없이 호롱불 아래서 2교대로 일할 정도로 물량이 많았다. 집에는 늘 부채에 그림을 그리는 할아버지들이 있었고, 눈이 닿는 곳곳에 부채가 있었다.

 그러나 새마을 운동이 끝나고 전주에 공단이 들어서면서 일꾼들이 공장으로 가버렸다. 얼마 후 곧 선풍기가 나왔고, 에어컨까지 나왔다. 설상가상, 중국에서 만든 싼 부채들이 시중에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부채는 사양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방화선 장인과 아버지 故방춘근씨는 가업의 흥망성쇠에 관계없이 부채를 만들었다. 그의 아버지에게도 부채는 인생 자체였다. 일제시대부터 부채를 만들기 시작해 해방을 맞고, 6.25때도 만들던 부채였다. 아버지에게 부채가 생사고락을 함께한 인생이라면, 딸 방화선 장인에게는 자연히 녹아든 삶 자체였다. 그렇기에 어렵다고 부채를 그만둘 수 없었다.

 방화선 장인은 선자장이다. 태극선을 비롯해 모든 단선 부채를 만들고, 유물을 복원해 옛 부채를 만든다. 단선 부채는 대살을 깎아 만드는 우리 고유의 부채로 서민들이 많이 사용했다. 전주에서도 3~4명 가량이 단선 부채를 제작하지만 계보를 이어 하는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금전적으로 어렵다 보니 부채를 배우려는 사람이 없고, 시작하더라도 중도 하차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 그러나 감사하게도 방화선 장인의 딸이 대를 이어 부채를 배우고 있다.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방춘근) 옆에서 심부름하다 보니 손녀딸에게도 부채가 삶의 일부분이 된 것이다.

 전통의 것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지금. 싼 중국산 부채 공세에 전통 부채가 한동안 밀려난 것 같았지만 부채 마니아들이 많이 생겨 일할 맛 난다고 한다.

 방화선 장인은 “초여름 더위가 시작될 즈음, 전주 한옥마을에 놀러 가보면 우리 전주 부채를 들고 다니면서 더위를 이겨내는 분을 만나면 감사하다”며 “사실 싼 부채들은 99%가 중국산인데, 진짜를 알아보고 사용하는 분을 발견할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시절의 변화와 함께 이제 부채는 더위를 쫓는 여름 생활필수품에서 멀어졌지만, 여름 전주를 찾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구매하는 수공예품 중에 하나가 부채인 것은 변함이 없다”며 “일을 하면서 전통의 맥을 잇는다는 비장감이나 부채를 만들면서의 고충은 없다. 하지만 더 좋은 재료로 더 다양한 부채를 만들고픈 욕망만이 가득하다”고 덧붙였다.

 최고의 재료를 사서 최고의 부채를 만들고 싶다는 방화선 장인. 그의 열정만큼, 전주의 오랜 전통 문화인 전주 부채가 더 많은 이들에게 선보이고 호흡해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기를 기대해본다.

고영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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