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최후승리 (1)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최후승리 (1)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3.23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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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軍 주력 11만 육해로 恨맺힌 全羅道 진격
망우당 곽재우 영정 / 경남 의령 곽재우사당 제공
망우당 곽재우 영정 / 경남 의령 곽재우사당 제공

 원균 휘하 조선 수군을 전멸시킨 일본군으로서는 1차전쟁때 이순신 휘하 조선수군에 당했던 연전연패의 치욕을 한꺼번에 설욕을 한 결과가 되었다.

 일본군 앞에 이제 거칠것이 없었다. 8월3일 2차전쟁 일본군 총사령관 소조천수추(小早川秀秋)는 전군을 좌·우군과 수군으로 나누어 한 맺힌 전라도를 향하여 총 진군을 개시했다. 제1차 공격목표는 전라감영이 있는 全州城이었다.

 우군은 모리수원(毛利秀元) 3만, 과도직무(鍋島直茂) 1만2천, 가등청정(加藤淸正) 1만 등 모두 6만4천300명을 대장 모리수원이 지휘했고, 좌군은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 도진의홍(島津義弘) 각 1만, 소서행장(小西行長) 7천 등 모두 4만9천600명을 대장 우희다수가가 지휘했으며 수군은 협판안치(脇坂安治) 1천200명 등 모두 7천200명으로 편성했다.

 釜山城에 1만을 비롯 서생포, 안골포 죽도 가덕도성 등에 2만명을 남겨 지키게 했다.

 右軍은 양산-밀양-창녕-합천-안의를 거쳐 육십령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전라도로 넘어가 鎭安으로 하여 全州城으로 향하고, 左軍과 수군은 수로로 남해를 따라 돌아 고성-사천에 상륙하여 河東을 지나고 섬진강(蟾津江) 물줄기를 따라 전라도로 북상하여 구례-남원을 거쳐 全州城에서 우군과 합류하기로 했다.

 우군 사령관 모리수원은 서생포에서 출발한 가등청정군, 기장과 김해에서 각각 출발한 흑전장전군 과도직무군 등 우군 병력을 양산해 집결시켜 밀양으로 진출하고 선봉 가등청정군이 창녕을 통과하는데 창녕 동쪽 2kmㄹ 지점의 화왕(火旺)산성에 경상우도 조방장 곽재우(郭再祐)군이 지키고 있었다.

 곽재우는 1차전쟁때 6번대 소조천강경(小早川降景)군의 부장 안국사(安國寺) 혜경(惠瓊)의 전라도진격을 좌절시킨 경상우도 의병장 紅衣장군이었다. 칠까말까 하루 밤낮을 망설이다가 그대로 지나쳐 초계(草溪) 합천(陜川)을 거쳐 16일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의 안의(安義)에 도달했다.

 안의 서북쪽 6km6지점의 옛성 황석산성(黃石山城)에 안음(安陰)현감 郭준이 前 함양(咸陽)군수 조종도(趙宗道) 도별장(都別將) 金海부사 백사임(白士霖) 등과 함께 안음 거창 함양 3邑의 군사와 백성들을 지휘하여 길목을 가로 막고 있었다.

 한편 이날 좌군과 수군은 3일간의 공방전 끝에 조선의 서남지역 요충 南原城을 유린했다.

 좌군 사령관 우희다수가는 7월28일 5만여 병력을 대규모 수송선단에 태워 부산포와 거제도 안골포에서 출발시켜 1차전쟁때 조선수군 이순신 함대에 의해 3백여 척이 넘는 일본수군 전함들이 수장된 남해를 서쪽으로 유유히 항진해 나갔다.

 조선수군은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일부는 고성에 상륙시키고 주력은 사천에 상륙시켜 8월4일 모두 사천에 집결시키고 5일에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선이며 전주와 남원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섬진강변의 하동으로 진출했다.

 편판안치의 수군 7천명은 더욱 서쪽으로 항진하여 전라도 광양현(光陽縣)의 두취진(豆恥津)에 상륙한 뒤 좌군 주력과 합류하고 일부는 배로 심진강을 거슬러 올라 구례에 상륙했다. 조선의 영산 지리산 노고단(老姑壇:1,507m))의 웅자가 가까이 보였다.

 11일 하동을 출발한 좌군은 다시 좌우 두 종대로 나누어 13일 좌종대는 요치(要峙)를 넘어 서남쪽으로, 우종대는 숙성령(宿星嶺)을 넘어 동북면으로 나가 南原城을 포위했다.

 성의 동쪽에는 봉수하가정(蜂須賀家政)군 등 1만4천900명, 서쪽에는 소서행장군 등 7천명, 남쪽에는 우희다수가군등 1만2천800명, 북쪽에는 도진의홍군 등 1만3천200명으로 총병력 5만6천800명이 겹겹이 에워쌓다.

 남원은 전라 좌(南) 우(北)도와 경상우(南)도 및 충청도로 이어지는 조선 서남지구의 전략적 요충으로 明군도 1·2차전 모두 남원을 지키려 했고 일본군도 남원부터 뺏으려 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8월19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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