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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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3.09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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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舜臣함대 6차출동서 日軍전함 31척 불태워
사명대사 영정 / 밀양시청 제공
사명대사 영정 / 밀양시청 제공

  조선 조정의 반대속에 明과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육상에서는 별다른 충돌이 없었으나 해상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의 조선 수군이 수시로 일본 수군기지를 공격했다.

 3월3일 이순신이 전라·경상·충청 3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겸 전라좌수사로 임명되고 본영을 한산도로 옮긴뒤 최초로 휘하 전라좌우수영 경상우수영 함선 60척을 거느리고 출동했다.

 그 무렵, 이본 수군은 조선수군의 공격이 뜸해지자 진해(鎭海)와 고성(固城)연안 일대 해안 마을을 습격하며 노략질을 일삼고 다녔다.

 이순신이 이를 응징코자 했다.

 이날 고성의 벽방(碧方:통영광도(統營光道))에 배치해둔 제한국(諸漢國)으로부터 "적선 21척이 당항포(唐項浦)로, 7척이 진해 오리양(吾里梁)으로, 3척이 저도(猪島)로 들어갔다"며 정확한 정찰보고가 들어왔었다. 이순신은 의령(宜寧)의 순변사 李빈에 전령을 띄워 일본군이 육지로 도주하면 공격하도록 하고 야간 항해로 거제도(巨濟島) 면지도(面紙島)에 이르러 밤을 새웠다.

 4일 새벽, 이순신은 전함 20척을 견내량(見乃梁)에 배치, 만일에 대비하고 나머지 전함을 이끌고 당항포와 오리량으로 전속 전진하여 증도(甑島)해상에 포진했다. 이때 진해선창에서 적선 10척이 나와 도망치다가 조방장 어빙담(魚?潭)이 추격하자 진해땅 읍전포(邑前浦)에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쳤다.

 어영담이 달려들어 적선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당항포에 들어간 적선 21척도 아예 싸울 용기마저 잃고 배를 버리고 모두 육지로 도망쳤는데 물이 빠지고 날이 저물어 당항포 입구를 막고 밤을 새운뒤 5이 새벽에 어영담이 다시 쳐들어갔다.

 잠시후 선창에 매어둔 적선에 공격을 퍼붓는 조선 수군의 포성이 새벽 하늘을 진동시켰으며 적선에서 타오르는 화염이 바다와 육지를 뒤덮었다. 멀리서 포성과 화염으로 당항포 일본 수군전함의 전멸을 지켜보던 영등포(永登浦) 웅천(熊川) 안골포(安骨浦) 가덕도(加德島)의 일본군들은 해안의 장막들을 거두고 토굴속으로 들어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출동 3일째인 6일, 이순신 함대가 거제도 앞바다를 항진하여 2차 공격 목표를 찾고 있는데 적선 1척이 명나라 군사를 태구고 다가서 패문(牌文)을 전했다.

 明군 부사(部司) 담종인(譚宗仁)이 웅천의 소서행장 진영에서 보낸 것으로 ’강화회담에 지장이 있으니 공격을 중지하고 본영으로 돌아가라’는 내용이었다.

 이순신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귀로에 올랐다.

 이순신 함대는 제6차 출동 당항포 2차해전에서 적선 31척을 불태웠으며 조선수군은 병력 함선 손실없이 귀환했다.

 6차 출동에 충청도 수군도 참천케 했으나 충청수사 구사직(具思稷)이 전투가 끝난뒤 12일에야 판옥선 10척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3월29일 조선 조정은 군사제도를 제승방략(制勝方略)에서 진관제(鎭管制)로 다시 되돌려 고수방어(固守防禦)개념을 채택했으나 실제로 있어서는 종전과 달라질 것이 없었다.

 4월13일 서생포(西生浦)의 가등청정이 조선의 승병장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을 일본군 진영으로 불러들여 강화회담을 가졌으나 입씨름만 벌였을뿐 성과가 없었다. 가등청정은 수길의 뜻이 강화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알고 강화회담의 공을 세워보려했으나 수길이 조선의 4道 분할 등 엉뚱한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회담이 성과를 거둘수가 없는 일이었다.

 유정과 가등의 회담은 그 뒤에도 7월12일, 12월23일 그리고 1595년(선조 28년) 3월3일에 걸쳐 전후 4차례 가졌으나 성과가 없었다.

 8월까지 명군 부총병 왕필적, 참상 낙상지, 유격장 송대빈, 곡추 등이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로 귀환 했으며, 마지막으로 8월2일 남원에서 한성으로 철수한 도독 유정이 휘하 5천병력을 이끌고 9월11일 귀국했다.

 이로써 명군은 일부 잔류 병력을 제외하고 주력의 철수를 끝냈다. 그 무렵 明나라는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어 국내사정으로 장기간의 해외파병이 어려운 실정에 있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8월4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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