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22) 神話창조 1
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22) 神話창조 1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7.02 1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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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조로 된 코리아나는 스위스는 물론 서독, 이태리, 핀란드의 TV에 출연하며 명실상부한 국제그룹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그룹이름을 둘러싸고 새삼 고민에 휩싸인 것은 아리랑싱어즈로 활동할 때 유럽의 신문이나 방송들이 우리들을 일본 출신으로 소개한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이라면 거이 무조건 질색을 하는 영일형이 고집을 부려 한국 출신의 그룹이라는 것을 부각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새로 정한 이름이 ‘코리아나’였다.

 멤버들 사이에서는 반대도 많았지만 영일형이 한국 출신을 가장 쉽게 알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해 채택됐다.

 영일형은 ‘코리아나’라는 이름만으로도 애국할 수 있다는 색다른 주장을 펴며 멤버들을 설득했던 것이다.

 그룹 ‘코리아나’로 거듭 태어난 우리들은 1982년 세번째 앨범 ‘Burning Fantasy(불타는 환상)’을 발표하면서 정상적인 활동을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코리아나에 새로 드러온 멤버중 김규식 씨와 유희 씨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그룹을 탈퇴했다.

 영일형은 다시 고민끝에 막내 애숙을 영입키로 결정했다.

 서독에서 캐시 리 앤드 코인스의 멤버로 활약하고 있던 우리 형제들의 막내 애숙은 1976년 14세의 어린나이에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CBS레코드사 주최의 신인 발굴 송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수상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그때 애숙은 그룹 서처스의 ‘굿바이 마이 러버 굿바이’ 다이애너 로스의 ‘베이비 러브’ 등을 불러 500여 명의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그랑프리를 차지해 CBS레코드의 전속가수가 돼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 회사를 통해 ‘신시내티 트레인’ 등 6장의 싱글들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녀의 독특하고 뛰어난 가창력이 코리아나를 보다 다양한 취향의 음악으로 연주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막내 애숙의 입단과 동시에 코리아나는 작곡가 프랭크 파리얀과 손잡고 새앨범 ‘High Laghts’를 발표했다. 이 앨범에서는 ‘헤이 미스터’ ‘투마치 러브’등이 히트해 ‘검은 눈동자’를 능가하는 큰 인기를 누렸다.

 1985년 우리들은 또 멕시 싱글 ‘Midnight Lover’를 발표해 히트를 했다. 이 노래는 미국의 인기 여가수 로라 브래니건을 출세시킨 잭 화이트의 곡이었는데 유럽 각국에서 가요차트 4위까지 오르는 대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룹 코리아나에 또다시 멤버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됐다.

 형수(홍화자)의 동생 홍윤식 씨가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리아나를 떠난 것이다.

 이렇게 결혼을 해서 또다시 멤버 한 사람이 떠나게 되자 우리 형제들은 결혼공포증에 걸리다시피 했다.

 7인조로 조직된 코리아나가 6인조에서 5인조로 결국은 4인조로 줄어버린 것이기에 우리들은 일종의 강박관념까지 갖게 되었다.

 4명만 남은 코리아나는 스위스는 물론 서독, 이탈리아, 핀란드의 TV에 출연하며 명실상부한 국제적인 그룹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명성이 높아지자 여러 곳에서 공동콘서트를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국내 음악팬들에게도 잘 알려진 스웨덴 출신의 아바가 아직 공연을 열며 활동할 때의 일이었다. 서독의 프로모터들이 코리아나와 아바의 인기공연대결을 벌이자고 제안해 왔다.

 <정리=서울 김순환 기자>  옮긴이 김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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