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17) 유럽行
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17) 유럽行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6.14 1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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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재일동포 위문공연을 마치고 기념촬영.

 우리들의 유럽진출 교두보가 된 카이로 공연은 영일형이 세계적인 흥행사이며 파리 리도쇼의 1인자 찰리 힌치씨를 알게된 것이 계기였다.

 찰리 힌치는 우리들의 베이루트 공연이 끝나자 카이로에 진출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국적이 프랑스인 찰리는 우리들이 카이로의 힐튼호텔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했던 것이다.

 1975년 여름 우리들은 베이루트에서 공연을 마치고 카이로의 힐튼호텔에 출연했다. 당시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준전시상태라 위험부담도 적지 않았지만 우리들은 월남에서의 공연경험도 있고해서 별부담을 가지지 않았다.

 중동의 강국 이집트는 그당시 北韓과 국교수립이 돼있었고, 南韓과는 외교관계가 없었다. 북한은 이집트·이스라엘전쟁에 많은 지원을 했던 관계로 카이로의 코리아관계행사는 모든 것이 北韓주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들이 카이로 힐튼호텔에서 공여늘 갖던 어느날 북한측이 각국 외교관을 초청, 리셉션을 갖게돼 ‘파이브 핑거스’가 무대에 서게되었다. 우리들은 공연중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 등을 불렀다. 北韓외교관들은 우리들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우리들은 개의치 않고 신나는(?) 공연을 했다.

 공연이 끝나고 우리들이 숙소로 돌아오자 납치하겠다는 협박전화가 걸려와 우리들은 호텔측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당시 호텔책임자는 독인인 아우만씨였는데 그는 경호원을 배치, 24시간 우리들을 보호해 주었다.

 한번은 또 北韓의 국회의장격인 고위급인사(이름이 기억나지 않음)가 국빈자격으로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우리들의 공연장에 머물렀다. 그 고위급인사는 우리들이 남한에서 온 사람들이란 것을 알고는 우리들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고생이 많다”고 했다.

 카이로 힐튼호텔에서의 공연이 3개월정도될 무렵 우리들은 프랑스 출신의 프로모터 버나 힐다씨를 알게 되었다. 팝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활약했던 버나 힐다는 영화음악과 레코딩프로듀서 등 다방면에서 활동해 유럽 연예게에서 손꼽히는 인물중의 한사람이었다.

 버나 힐다는 우리들의 공연을 볼때마다 재능이 아깝다는 말을 거듭하였다. 유럽진출을 제의하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영일형은 그의 말을 그저 듣기좋은 소리로 치부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베이루트에서 공연할때도 여러 흥행사들로부터 그러한 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공수표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깜짝 놀랄만한 일이 한달도 못돼 우리들에게 전해졌다. 버나 힐다가 계약서와 비행기표를 보내온 것이다.

 영일형과 우리들은 즐거운 고민에 빠져 들었다. 카이로 힐튼호엘과의 계약기간은 한달이 더 남았는데데 버나힐다가 보내온 계약서는 빠른 시일안에 프랑스로 와서 계약하라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영일형은 고민끝에 호텔책임자인 아우만씨에게 까닭을 얘기하고 협조를 부탁했는데 예상과 달리 “좋은 소식인데 계약기간에 구애받지 않고 기꺼이 보내 주겠다”며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정리=서울 김순환 기자>  옮긴이 김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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