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9) 유년의 삽화 8
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9) 유년의 삽화 8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5.17 09: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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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즈 앤드 돌스’ 활동 당시의 모습. 왼쪽부터 용규, 남석훈씨 승규.

 용규가 갖고 있던 볼링공이 조종실문에 부딪친 것이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승객들이 웅성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자 나와 용규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쳐다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잠시후 여객기가 공항에 무사히 도착한 뒤 조종사들이 밖으로 나와 누구공이냐며 범인 색출(?)에 나서기 시작했다.

 나와 용규는 당황하고 있을때 영일형이 나서서 어린애들이 순간적으로 실수한 일이니 용서해 달라고 했다.

 조종사들도 어린이들의 실수라는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공을 돌려준뒤 용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1968년 여름 우리들은 채명신(蔡明新) 장군이 이끄는 맹호부대를 위문공연한데 이어 청룡부대 여당본부(사령관 金연상)을 방문 무료 공연을 가졌다.

 우리들의 이 공연이 끝나자 채장군과 김사령관은 어느 무엇보다 국군들의 사기를 높이는데 큰 보탬이 되었다며 치하해 주었다. 우리들 역시 우리 동포, 형제들을 위한 공연이었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그해도 저물어가는 12월 우리 현제들에게 가장 슬프고 괴로운 일이 일어났다. 우리 코리안 플라워 멤버들은 그때 앙케 공연을 마치고 그곳에서 성탄휴가를 보낸뒤 사이공으로 향했다.

 우리가 헬리콥터에서 내리자 뜻밖에도 우리의 활동을 관리하는 佛회사의 사장과 직원들이 우리를 마중나와 있었다.

 사장이 직접 마중나온 일이 없었던 관계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사장은 말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뒤 사장은 나와 용규, 영일형을 부르더니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지난 18일 방콕 크리스천병원에서…. 사무실로 연락이 왔었지만 공연중인 너희들에게 차마 알릴 수가 없었다. 장례식은 그 곳에서…”

 영일형의 통역으로 겨우 알아들은 우리들은 멍청히 사장 얼굴만 쳐다 보았다. 사장은 뭐라고 또 얘기했지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내 손이 눈언저리를 닦는 순간 갑자기 용규가 울음보를 터뜨렸다.

 재현형과 내가 용규를 달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내 눈에서 쏟아지고 재현형도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목메어 우는 바람에 헬리콥터장은 울음바다로 변했고, 주위사람들과 사장도 눈시울을 적셨다.

 그렇게 한참을 통곡하니 목이 쉬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프랑스회사 사장은 그때서야 자초지종을 다시 설명했다. 태국주재 한국대사관의 알선으로 교민장으로 성대하게 장례식을 끝냈고 아버지도 방콕에 계시니 빨리 가보라는 설명이었다.

 아버지(李延漢)는 당시 방콕에서 어머니와 함께 KORTHAI라는 프로덕션을 차려 美공군기지를 상대로 연예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전 아버지는 서울을 오가며 동생 상규와 애숙을 중심으로 Six Coins라는 그룹을 조직, 유니버설이라는 연예대행사를 통해 美8군무대에서 활동을 벌이다가 東南亞로 진출시킨 터였다.

 상규가 여덟살, 애숙이가 여섯살때였다.

 막내인 애숙은 특히 어머니를 빼닮아 노래를 잘해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두 동생은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가 돌아가실때 방콕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뒤늦게 방콕에서 약 30km떨어진 나콤카논이라는 크리스천묘지의 어머니 무덤을 찾아 대성통곡을 했지만 이승을 떠난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정리=서울분실 金淳煥기자>  옮긴이 김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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