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을 속였어!
나는 세상을 속였어!
  • 조미애
  • 승인 2013.10.15 17: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초저녁 서쪽하늘에 금성이 유난히도 크게 보인다. 맨눈으로도 그 밝기가 대단하다고 느낄 정도인 것을 보면 지구와 금성의 거리가 무척 가까워진 것 같다. 몇 뼘 위로는 동전만한 상현달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며칠 전에 내린 비가 하늘의 먼지를 밀고 온데다 구름마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금성이 달보다 멀리 있어서 그렇지 만일에 금성을 달과 같은 위치에다 놓고 바라보면 금성은 달보다 10배 이상이나 밝은 별이다.

태양이 동쪽하늘에서 떠서 서쪽하늘로 지는 것처럼 달도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진다. 해가 진후에 서쪽하늘에 보이는 초승달은 이제 막 뜬 달이 아니라 지금 지고 있는 달이다. 해가 뜬 이후 아침나절에 동쪽에서 떠올라 종일 하늘에 있었으나 햇빛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 해가 지고난 후에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가끔 하늘에서 해와 달을 함께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흔히들 해가 지고나면 달이 뜬다고 말한다. 지는 달을 보면서 떴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명한 사실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하고서도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도 하고 달리 말하면서도 스스로 잘못인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어떤 지식은 누군가에게 기초상식이 되고 때론 전문지식이 되기도 한다. 바닷가에서 보게 되는 밀물과 썰물이 지구를 떠나 하늘에서 바라보면 지역에 따라 바닷물이 더 부풀어 오르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한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이 백년을 산다고 해도 우주에서는 참으로 하찮은 시간이지만 한 해 씨를 뿌려 자라나 꽃이 피고 열매 맺은 후 제 몫을 다하고 가는 초목을 바라보면 참으로 길고 귀한 시간이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오듯이 자연 속에서 우리의 삶은 지금 어느 계절쯤에 있는 것일까?

“나는 세상을 속였어! 그림을 그린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놀고 다니며 훗날 무엇이 될 것처럼 말이야.”

이중섭이 심신의 막 다른 피로와 절망 속에서 쓰러졌을 때 나온 이 말의 배경에는 그의 말 못할 고통이 스며 있었고 식음을 전폐하는 절단에 나아간 것이다. 자학이라면 무서운 자학이요 도전이라면 무서운 도전이었다. 막말로 하면 그림으론 세상이 먹여주지 않으니 안 먹겠다는 것이요, 이 현실엔 그림은 소용없으니 안 그린다는 것이요, 이러한 자기 예술에 대한 순도에는 처자도 불가침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병적이었다고밖에 달리 표현 못하지만 이를 결행한 그에게 있어서는 정연한 이로理路와 완강한 자기 진실이 아닐 수 없었고, 또 외길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그와 평생지기였던 구상 시인은 이중섭의 인품과 예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중섭은 분노한 소를 통해 일제치하에서 압박받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그렸던 천재 화가였다. 그림은 그의 생존과 생활과 생애의 전부였다. 1955년 5월 대구개인전 이후 7월에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일체의 음식을 거부하다가 이듬해 9월에 외롭게 숨을 거두었다.

실상 그는 곤경 속에서 간혹 친한 벗들의 신세를 지면서도 결코 무리하게 강청하지 않았으며 친숙한 처지 외에는 동정을 하여 누군가 후원을 제의하고 나서도 거기에 응하지 않았다. 현실적 불행을 남에게 돌리고 세상이나 사회를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과 무력과 불성실로 돌리고 자책했던 것이다.

불우했지만 이중섭의 행적은 그의 그림과 함께 역사가 되었다. 불확실한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틈만 있으면 자신을 과대 포장하여 내보이고자 애쓰는 현대인에게 내면의 세계를 깊이 성찰한 선인들의 말씀은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구상 시인은 훗날 <임종고백>이라는 시를 남기셨다.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 속이며 살아왔다...이는 내가 나를 마주하는 게/무엇보다도 두려워서였다.../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나는/저승의 관문, 신령한 거울 앞에서/저런 추악 망측한 나의 참모습과/마주해야 하니 이 일을 어쩌랴!//하느님, 맙소사!’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밝게 빛나는 금성처럼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혼돈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한 줄기 빛이다.

조미애 <詩人>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