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청자와 부안청자
강진청자와 부안청자
  • 유병하
  • 승인 2013.10.08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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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 처음 들어와 선배들로부터 ‘강진청자’와 ‘부안청자’에 대하여 귀가 따갑도록 자주 들었다. 그 이후에도 두 청자를 구분하는 방법과 독특한 미적 가치에 대해서 충분히 배울 기회가 있었고, 각종 전시를 통해서도 실물 경험을 여러 번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어언 25년을 박물관에서 근무하다 보니 필자에게는 ‘고려청자’라고 하면 곧 ‘강진청자’와 ‘부안청자’를 의미하게 되었다.

사실 고려청자는 12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해남과 고창, 인천, 서산, 용인, 부산 등지의 가마에서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았다. 오로지 강진과 부안에서만 지속적으로 질 좋은 청자가 생산되었는데, 왜구의 침탈에 의해서 더 이상의 조업이 어려워지는 14세기까지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어 왔다. 그러다보니 강진과 부안이 고려청자의 본향(本鄕)으로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부안청자는 강진청자에 비해 화려하면서도 부드러운 양식을 지니고 있어서 연구자에게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주목을 받아왔다. 예컨대 부안 유천리에서 생산된 청자기와나 상감청자(象嵌靑磁), 동채청자(銅彩靑磁), 철채청자(鐵彩靑磁)가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현재의 부안청자는 상대적으로 강진청자에 비해 본래의 위상이 크게 축소된 상태이다. 즉 강진청자가 탄탄한 학술적·산업적 기반을 토대로 전국적·세계적으로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있는데 반해, 부안청자는 최근에 청자박물관이 개관되면서 겨우 존재를 알리는 정도이다.

이러한 차이는 강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즉 강진군은 전라남도와 함께 1997년 강진청자박물관 개관을 계기로 청자와 관련된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먼저 박물관 시설과 인력을 기반으로 지금까지 가마와 주변의 관련된 유적을 발굴해 왔고, 조사내용과 연계된 기획전시, 학술대회를 동시에 개최하였다. 그 과정에서 학술적 기반이 강화됨과 동시에 강진청자만의 특징과 가치가 전국적으로 널리 부각되었다.

아울러 강진군은 강진청자의 ‘세계 명품화’를 강력하게 추진해 왔다. 단국대 도예연구소와 함께 청자 생산의 신비를 파헤치면서 확보된 기술과 보유 장비를 이전·대여함으로써 지역의 도자업계를 일으켜 세웠다. 그들이 생산한 재현품이나 현대적으로 디자인된 창작품은 청자축제와 청자엑스포, 전국 순회전을 통해 국내 각 지역에 선보여 왔다. 그리고 파리나 도쿄·오사카·워싱턴·애틀란타·시카고·아순시온·부에노스아이레스·보고타 등지의 전시장에서도 대륙별 순회전이나 박람회의 형식으로 지구촌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게다가 ‘강진 고려청자 특구’로도 지정되어 청자촌과 청자클러스터의 조성, 청자인터넷쇼핑몰의 개설까지 한창 추진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강진청자의 약진은 눈이 부실 지경이다. 상대적으로 부안청자의 부진은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고려청자의 근간을 이루는 두 개의 큰 줄기 중에서 강진만을 본고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이 될까 두렵다. 따라서 차이가 더 심해지기 전에 부안청자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작업을 지금부터 시작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즉, 청자 생산의 비밀을 찾아내고 널리 알려서 결국에는 청자를 통해 지역의 발전까지 이룰 수 있도록 적극 도모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부안군이 나서 학술적 기반을 탄탄하게 갖추도록 해야 한다. 유천리·진서리 일대의 청자가마부터 세밀하게 발굴한 후 조사내용을 가지고 학술대회와 기획전시를 개최하여 부안청자의 실체를 낱낱이 밝혀야 한다. 또한 새만금 해역에서의 조사성과를 새롭게 확인하고 알리는 일도 병행해야 한다. 이미 십이동파도, 비안도, 야미도에서 청자를 나르던 침몰선이 확인된 바 있다. 그중에서도 비안도 앞바다에서 인양된 것은 태안 마도의 그것과 함께 부안청자로 밝혀짐으로써 부안청자의 생산과 함께 이동경로도 구체적으로 확인된 셈이다. 이렇게 새로 찾아낸 학술적 정보는 곧 전국을 대상으로 부안청자를 알리는 적극적인 홍보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새롭게 밝혀진 유천리 청자가마의 세부구조와 개업·폐업시기, 유통과정 등은 전국적으로 중요한 뉴스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유천리의 청자가 곧 고려청자의 근간이었으며, 그때나 지금이나 최고의 명품으로 한국적 미의식의 표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안군과 전라북도는 부안청자를 통해 지역적 발전을 이루는 비전을 수립하고 실행전략까지 꼼꼼히 마련해야 한다. 게다가 강세황도 주목하였던 변산반도의 유려한 자연환경, 내소사·개암사와 같은 유서깊은 사찰, 실학자 유형원의 고뇌가 담긴 유적지, 백제 부흥운동의 터전이었던 금암산성, 세계 자연유산으로 거뜬히 등재될 만한 서해안의 갯벌이 주변에 있으니 이 모두를 부안청자와 연계시켜 프로그래밍 해나간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안군과 전라북도는 ‘무엇인가 하고자 스스로 열심히 움직이는 주인의 모습’을 대내외에 적극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부의 각 부처나 산하 연구기관, 대학, 기업체 등과도 긴밀한 지원·협력 체계가 구축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마련되어야 부안청자의 실질적인 재도약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유병하 <전주국립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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