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성의 지위에 대한 오해
조선시대 여성의 지위에 대한 오해
  • 이동희
  • 승인 2013.09.25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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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남지방 수심가에 “날 낳고 우리 아버지 왼새끼 꼬며 울었다”라는 대목이 있다고 한다. 왼새끼줄은 아이를 낳으면 집 대문에 치는 금줄로, 이 대목은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을 낳은 서러움을 토로한 것이다. 왼새끼라고 한 것은 잡귀를 막으려고 치는 금줄의 경우 보통 새끼줄과 다르게 왼쪽으로 새끼를 꼬기 때문이다.

 방 밖에서 초조히 기다리던 아버지가 아들을 낳으면 춤추며 마당을 세바퀴 돌고 왼새끼를 꼬러 사랑에 들지만, 딸을 낳으면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 조선시대는 남성 중심의 사회로 딸의 출생은 환영받지 못한 일이었다. 조선의 여인은 아들을 낳아 집안의 대를 잇게 하는 것이 부덕이고 의무였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우리가 막연히 아는 것처럼 그렇게까지 낮지는 않았다. 우리 세대가 기억하고 떠올리는 조선의 여성상은 조선말의 것들이다. 조선말로 가면서 여성의 지위가 더욱 낮아졌으며, 낮아진 조선말의 여성상을 조선왕조 500년 내내 그랬던 것처럼 잘못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재산상속이 장자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사실은 16세기까지만 해도 아들 딸 균등상속이었다. 아들과 딸이 균등하게 재산을 나누어 물려받던 것이 17세기를 과도기로 하여 큰아들 중심의 상속제로 바뀌었다.

 왜 아들 딸 균등상속에서 아들 중심의 상속제로 바뀌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유교사회가 토착화되면서 그랬다는 설도 있고, 경제적 문제로 그리했다는 설도 있다. 처가에서 딸에게 상속한 재산은 남편이 부인의 허락 없이 처분할 수 없었다.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했으니 이에 동반되는 제사도 아들과 딸이 돌아가면서 모셨다. 그러다가 장자 위주로 상속되면서 장자가 제사를 모시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아들이 없으면 딸이 제사를 받들었다. 율곡 이이가 어머니 신사임당 집안의 제사를 모셨음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외손봉사라고 한다.

 족보의 경우도 그렇다. 조선전기의 안동권씨성화보, 문화유씨가정보 등에는 아들의 후손인 친손만이 아니라 딸의 자식인 외손들도 같이 수록되었다.

 그러다가 조선후기에는 친손들만 수록되고 외손들은 딸의 자식 정도만 수록되었다. 딸의 이름이 수록되지 않고 사위 이름이 올라가는 것은 초기나 후기나 똑같지만, 외손의 수록 여부가 달라진 것이다.

 조선이 남성중심의 사회인 것은 맞지만, 그 안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변화가 있었다. 물론 살아생전에 아들에게 재산을 미리 물려 줄 수 있고, 족보에 외손이 빠진 것이 수록자들이 많아진 것에도 요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하더라도 사후에 상속이 균등했고, 족보에 외손이 수록되는 사회의 여성과 그렇지 않은 사회 여성의 지위는 같지 않다.

 사극을 보면 사대부가의 경우 부부간에 서로 존대어를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남편이라고 해서 부인에게 말을 놓지 않고 상경(相敬)하였다. 무덤에서 나온 원이엄마의 편지에서 보는 것처럼 부부간의 사랑이 절절하기도 하였다. 첩을 천대한 것은 여자라는 이유가 아니라 적실과의 구분을 위한 것이었다.

 칠거지악이라고 해서 아들을 낳지 못하면 부인이 쫓겨난다든지 하는 것들이 있지만, 삼불거(三不去)라고 하여 부인이 오갈 곳이 없거나, 부모 3년상을 같이 치렀거나, 같이 고생하여 부(富)를 이루었으면 쫓아낼 수 없었다. 대개는 같은 층의 집안 간에 혼인이 이루어지므로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이 사는 것은 100년도 안 되지만 역사는 장구하여 오랜 세월에 걸친 인간사의 변화상이 담겨 있다. 세상은 변한다.

 다만, 때로 이를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그렇게 변화되었다. 요즘에는 효도 광고에 딸들이 눈에 많이 띈다. 효부에서 효녀로 중심이 옮겨가는 느낌이다.

 전주역사박물관에서 조선 여인의 삶을 담은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기획재정부 복권기금 지원을 받아 전주역사박물관, 전북대박물관, 원광대박물관, 어진박물관, 전주한지박물관, 예수병원의학박물관 등 도내 6개 박물관이 같이한 공동전이다. 조선시대 여성상을 유물로 일견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동희<전주역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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