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일과 뒷일
앞일과 뒷일
  • 이동희
  • 승인 2013.09.01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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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눈이 앞에 달렸어 망정이지, 만약 뒤에 있다면 참으로 민망할 노릇이다. 일단 지나가고 나면 후회투성이인 자기 삶의 발자취를 뒤에 달린 눈이 일일이 봐내야 하니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밟아온 길을 되짚어가며 지난 일을 일일이 되새기며 반추하느라 단 한 걸음도 쉽게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눈이 앞에 달려 있는 것은 자꾸만 뒤를 흘깃거리지 말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라는 조물주의 섭리일 듯하다.

 유대인 랍비들의 지혜를 모은 책 『탈무드』에는 ‘사람에게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인 것은 (귀로)들은 것의 절반만 (입으로)말하라’는 뜻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탈무드 식으로 말하면 ‘사람에게 눈이 앞에 달린 것은 앞만 보고 달려가야지 뒤돌아보며 망설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때의 앞과 뒤는 시선의 앞뒤[前後]이니 별 혼란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밟아온 뒤[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밟아갈 앞[미래]을 향해 나아가라는 말이다.

 팔순이신 여류 문사를 모시고 점심을 하는데 이런 말씀을 하신다. “이제 1학년이 되었으니 앞으로 9학년만 무사히 마쳤으면 좋겠어!” 무슨 일인지 처음엔 뚱했지만 이내 그 뜻을 알아차렸다. 올해 여든한 살이 되었으니 구십까지만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요즘에도 식지 않은 열정으로 수필을 쓰고, 문화강좌 교실에도 열심히 출입하는 열정과 건강으로 보아 망구(望九-아흔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여든한 살을 일컫는 말)는 물론 망백(望百-백세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아흔 한 살을 일컫는 말)을 넘어 백수(白壽-百에서 하나가 부족하다는 뜻으로 아흔아홉 살을 일컫는 말)도 거뜬하실 어른이시다.

 자신이 처한 삶의 한계까지도 저리 허심탄회하게 술회할 수 있으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인생 경륜을 쌓아야 할까 잠시 망연했다. 여생의 유한함에 다급해 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뒷일에 대한 미련도 없이 앞일의 무명을 내다보는 여유를 찾으려면, 나에게는 참 많은 인생수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어르신이 남기신 뒷날이 제 앞날의 배움이 될 수 있도록 분발’ 하겠노라는 다짐을 위로의 말씀으로 드렸다.

 한 번은 필자가 진행하는 전북노인복지관 문예교실에서 ‘1년 뒤의 나를 상상하고, 그 1년 뒤의 나에게 편지쓰기’를 과제로 제시하였다. 내가 나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다. 이미 인생 경륜에서 쓰고 단맛을 겪을 만큼 겪은 연치, 살아오면서 몸과 맘으로 치른 애환이 절대 만만치 않았을 분들에게 시간이 그냥 아무 받침대 없이 지나가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새로운 발심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몇 분이 그런 편지를 써서 제출하였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뒷일’을 어찌 짐작이나마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앞일’을 내다보며 써 내려간 편지글을 살펴보자니, 읽는 나의 심금이 먹먹해졌다. 육십 내지 칠십 평생 살아온 자기 인생에 대한 긍정과 위로의 덕담을 건네는 진지한 성찰, 노년의 시간이지만 결코 허투루 삶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 작은 과실이나마 목표를 세우고 이를 실천하는 삶에 대한 의욕적인 설계 등이 가득했다. 언제 한 번이나마 이렇게 진지하게 자기 자신과 내면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던가? 꼬박 1년이 지나고 나서 ‘자기편지’를 받아본 이분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한글학회에서 엮은 『우리말큰사전』에 보면 <*앞일: ①앞에 새로 닥쳐올 일 ②제 앞에 놓여 하여야 할 일, *뒷일: 지나간 일에 관련이 있는 일, 장차 뒤로 생기는 일>이라고 풀이하면서, 그 용례로 ‘네가 게을러서 네 앞일이 걱정이다’ ‘뒷일은 내가 처리하겠다’ ‘뒷일을 부탁하오’ 등으로 되어 있다. 이 낱말 풀이대로 보면 그 뜻을 모를 바는 아니다. 앞일이나 뒷일은 그 말하는 시점이 문제이긴 하지만, 쓰임에 따라서는 둘 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가리켜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눈이 앞에 달렸다고 앞만 바라보며 살지는 않는다. 비록 뒤에 눈이 없어도 성찰의 눈으로 뒤돌아보며 사는 게 인생이다. 망백의 노 문사가 남긴 뒷일은 바로 그보다 젊은 문사가 외면할 수 없는 앞일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일 년 뒤건 십 년 뒤건 나에게 앞날을 내다보려는 지혜가 없고선 나의 뒷일이 불투명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개인이건 단체건 역사의 ‘앞일’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 한 ‘33년 만에 재등장한 내란음모사건’이라는 ‘뒷일’을 전하는 아침 뉴스에 억장 무너지는 아픔을 겪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동희<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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