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옥잠
물옥잠
  • 진동규
  • 승인 2013.08.29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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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잠화’ 어딘가 조금은 힘이 들어가 있는 듯한 이름이다. 우리말 꼴의 이름이 아닌 것이다. 우리말 꼴 그대로 걸치고 나온 이름이 아니다. 누구인가 먹 갈아서 지은 이름이다. 붓대를 몇 번은 만지작거리고 붓동을 세워서 지어준 이름이지 싶다. ‘애기똥풀’이나 ‘며느리 밑씻개’처럼 생긴 모습 그대로를 형상화하거나 살이를 하면서 미운 짓 고운 짓 익살로 버무려가면서 지어준 것이 아니다.

 옥비녀같이 생기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명명식을 하는 그날 갓쟁이 몇은 거나했으리라. 해맑은 백자 빛 꽃송이를 놓고 점잖은 기침을 해대며 옥잠화잎나물 무쳐냈을시 분명하다. 옥잠화잎 나물이 어디 아무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던가. 꽃봉오리는 따서 찹쌀가루를 묻혀 기름에 튀기고 윤기 흐르는 잎은 따다 삶아서 길게 찢어 찬물에 담갔다. 살코기는 부드럽게 칼로 다져서 덖었다. 찬물에 담근 잎나물을 건져 함께 무쳐내는 정성이 어딘가. 그런 안주라면 아무나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다. 그때 내가 옆에 있었더라면 무어라고 했을까? 터뜨리듯 소리를 내어 질렀겠지. ‘처녀 비녀야!’ 그렇게 쏟아냈는지 ‘저런 저런!’ 점잖으신 영감님들 혀를 몇 번 차고 몰아세우고 돌아앉아 버렸겠지.

  물옥잠은 수생식물이다. 잎이며 꽃이 옥잠을 닮다 보니 덤으로 붙여진 이름이지 싶다. 옥잠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옥잠화는 백합과에 속하는 알뿌리 식물이고 물옥잠은 물 위에 떠서 사는 부유식물이다. 비라도 좀 많이 내려서 물이 넘치면 어디론가 흘러가야 하는 숙명을 타고 태어났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생각할 수도 없고 어디를 선택할 수도 없다. 삶과 죽음의 길이 달라질 수도 있는 흐름을 타고 갈 뿐인 것이다.

 고창의 운곡습지를 찾았다가 물옥잠을 만났다. 물옥잠꽃, 그 작은 꽃 한 송이가 경전이었다. 맑고 깨끗함으로 지은 경이었다. 붓자국 선연한 표정은 제가 가꾸어 온 아름다운 그것이었다. 경전이다. 천당과 지옥이 없는 경전이다. 저 작은 꽃송이에는 경이로운 것들만 있었던가 보다. 내어 지르는 환희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내가 부끄럽다. 이른 경지가 예술이라니. 명창 진채선이 옆에 있었더라면 저 환희의 음률에 옥비녀를 뽑아들었을 것이 아닌가. 그러면 중모리 가락 질펀할 것이 아닌가.

 숙연해지는 순간이었다. 운곡습지 한구석이 작은 꽃송이 하나로 미술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떤 화가의 캔버스가 이런 조합을 이끌어낸다는 말인가. 구도자라기보다 디자인이었다. 미술대학의 강의실 수준을 넘어서 있지를 않은가. 여리디여린 암술 하나를 받치는 꽃잎 한 장에 운곡습지의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고운 빛깔들을 절묘하게 조합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장다리밭의 장다리꽃은 꽃가루를 옮겨준 노랑나비 흰나비의 어린것들을 키워낸다. 탱자나무 탱자꽃은 꽃가루를 옮겨준 호랑나비의 어린것을 또 길러내지 않던가.

 물 위를 떠돌아 사는 물옥잠은 물의 깊이를 재어보지도 않는다.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제 부드러운 잎사귀에 어린것을 맡기러 오는 나비도 없다. 원삼 족두리의 신부다. 초례청의 신부가 수줍기만 하다면 꽃잎에 차려놓은 신부의 차림은 훨씬 동적이고 화려하다. 양 어깨로 흘러내린 족두리는 아예 양쪽 옆의 꽃잎에 굵은 터치로 죽죽 힘을 실어 놓았다. 춤으로 맞이하겠다는 것이리라.

 물옥잠은 수상식물이다. 물이 넘치면 어디로도 흘러가리라. 가마를 기다리는 신부다. 가마가 오면 떠날 것이다.

 진동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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