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서예가
잊혀진 서예가
  • 유병하
  • 승인 2013.08.20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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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향(書鄕)이다. 오랫동안 서맥(書脈)이 도도하게 이어져 왔고, 조상들이 남긴 흔적뿐만 아니라 전통과 현대를 잇는 여러 활동도 다른 어떤 지역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하기에 전북을 문향(文鄕)이나 예향(藝鄕)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오히려‘서향(書鄕)’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전북의 서맥은 백석(白石) 유즙(柳楫, 1585~1651)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뒤를 이어 창강(滄江) 조속(趙涑, 1595~1668), 송재(松齋) 송일중(宋日中, 1632~1717),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 1840~1910)이 전주와 김제에서 명필로 활동하였다. 20세기를 넘나들면서도 창암 이삼만과 석정 이정직의 서맥을 잇는 수많은 제자들이 전북 서단(書壇)의 큰 줄기를 이루어 나갔다. 예컨대 벽하(碧下) 조주승(趙周昇, 1854~1935),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 1882~1956), 설송(雪松) 최규상(崔圭祥, 1891~1956), 운호(雲湖) 김정기(金正基, 1904~1951)와 같은 이들이다. 그중에서도 석전(石田) 황욱(黃旭, 1898~1992)과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1913~1999)은 제각기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며 전북뿐만 아니라 한국서단의 거목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서맥을 통해서 독자적으로 뿌리를 내린 전북의 서단은 1990년대부터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어 오고 있다. 즉 전국적인 서예전의 개최, 원광대 서예과의 설립, 서예 학술재단의 설립을 이룩하였다. 또한 전문적인 서예관이 계속해서 문을 열고 있으며, 서예를 테마로 삼은 국제적인 행사인 비엔날레도 개최하고 있다. 또한 서예협회와 각종 서예동호회의 활동상도 눈이 부실 정도이다. 이와 같이 조선 중기 이후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이어져온 서맥과 그 활동 모습은 전북 내 도로, 문화유적, 음식점과 숙박업소, 공방에 이르는 각종 현판(懸板)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한옥마을이 활성화되면서 건물마다 현판과 주련(柱聯)에서도 명필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서향(書鄕)으로서의 전북을 살펴볼 때, 우리에게 잊혀진 서예가도 있는 것 같다. 바로 전북 출신 고승(高僧) 들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석전(石顚, 1870~1948)과 탄허(呑虛, 1913~1983) 스님이 있다. 먼저 석전 스님은 전북 완주의 중농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일찍부터 학문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서 이미 17세에 학동을 가르치는 선생 역할을 할 정도였다. 그가 청소년기에 쌓은 유학적 소양은 육당 최남선, 위당 정인보, 춘원 이광수 등과 더불어 교유할 수 있는 대학승(大學僧)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게다가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성품까지 더해져 많은 시문을 유묵(遺墨)으로 남겼다.

그리고 탄허 스님은 독립운동가인 율제(栗齊) 김홍규(金洪奎, 1888~1959)의 둘째 아들로 전북 김제에서 출생하였다. 유년 시절부터 천재 소리를 들으면서 한학자(漢學者)인 조부와 부친, 그리고 고을의 선생으로부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한 유학(儒學)의 전 과정을 마쳤다. 입산하기 전에 도교에 대한 깊은 공부도 하였으며, 출가하여 수행에 힘쓰면서 불가(佛家)의 공부에도 크게 진전을 이루어 20대 중반에 이미 유불선(儒佛仙)에 정통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석학으로서의 학식과 선승(禪僧)으로서의 깨달음을 수많은 유묵으로 남겨 놓았다.

그들이 나고 자란 곳이 전북이다. 마신 물이 전북의 우물이며, 먹은 음식이 전북의 고을 음식이다. 어울린 학동들이 전북의 청소년이고, 배운 공부는 전북의 스승으로부터 얻은 한학(漢學)이다. 즉 사람의 근본이 전북이라는 의미이다. 게다가 예로부터‘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 하여, 글씨는 곧 사람의 인품과 교양, 학덕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글씨에 대한 연마는 결코 소홀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그들은 서풍(書風)이 강하던 전주와 김제에서 살았으니 청소년기부터 한문으로 서책(書冊)을 읽고, 시문(詩文)을 지으면서 문기(文氣)가 넘치는 전북의 서예를 익혔을 것이다.

석전과 탄허 스님이 남긴 유묵은 불가에서 각각 ‘석전체(石顚體)’와 ‘탄허체(呑虛體)’로 불릴 만큼 생전에 이미 글씨에 명성을 얻었다. 그들은 철저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고, 독특한 자기만의 정신세계를 구축하였다. 그 높은 깨달음의 경지, 즉 마음을 담아낸 것이 바로 그들의 유묵이다. 때로는 넘치는 격정과 개성을 담고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때로는 청징(淸澄)한 마음을 평온한 글씨로 표현하였다. 그들은 학승(學僧)으로 이름을 날리면서도 신라의 김생(金生, 711~791), 고려의 탄연(坦然, 1070~1159), 조선의 만우(卍雨, 1357~?)와 휴정(休靜, 1520~1604), 근대기와 일제강점기의 만공(滿空, 1871~1946)과 경봉(鏡峰, 1892~1982), 만해(萬海, 1879~1944)와 같은 명필 승려의 면모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불가의 학승 혹은 선승으로는 기억하고 있으나 전북이 낳은 명필로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기존 서단과의 교류나 정통 서예 공부가 미흡할지라도 그들의 학문적, 정신적 배경에는 엄연히 전북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한 번쯤 전북의 서예가로서도 기억해봄직하다.

 유병하 <국립전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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