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330년의 벽골제는 저수지인가 방조제인가
서기 330년의 벽골제는 저수지인가 방조제인가
  • 김양식
  • 승인 2013.08.15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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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최고(最古)·최대(最大)의 고대 저수지는 사적111호인 김제 벽골제로 공인되어 있다. 벽골제는 서기 330년(백제 비류왕 27년)에 축조되었고, 790년(통일신라 원성왕 6년, 삼국사기), 1143년(고려 인종 21년, 신증동국여지승람)과 1415년(조선 태종 15년, 태종실록)에 중수되었다. 1420년(조선 세종 2년)에는 심한 폭우로 유실이 있었고, 일제 강점기인 1925년 동진농지개량조합에서 이 제방을 운암제 설치에 따른 김제간선수로로 개조함으로써 그 원형이 크게 훼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제 벽골제와 더불어 삼한시대에 축조된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는 고대농업 수리시설로 매우 소중한 자산이다. 특히 벽골제는 축조·중수를 통하여 길이 3.3km, 높이 5.7m, 상단폭 10m, 하단폭 21m의 위용을 갖추었으며 관개면적은 10천ha(3천만평)나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우리나라 저수지(17,505개)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소양강 다목적댐이다. 농업용 저수지로는 섬진댐(농업용수와 생활·발전 겸용)이 가장 크고 관개면적은 30,966ha이다. 그다음 규모는 나주호(순수한 농업용)로 관개면적이 9,016ha임을 감안하면 벽골제의 거대하고도 당당함을 알 수 있다.

농경문화의 중요한 벽골제가 시축(始築) 당시 방조제의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가 2003년 6월 한국관개배수 제10권 제1호(박상현외 4명)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2007년 계간지 ‘시대정신’ 여름호에 벽골제는 농업용 저수지가 아니라 바닷물 침입을 막는 방조제였다는 논리를 제기한바 있다

2012년 1월에 허수열 충남대 교수가 그의 저서 ‘일제초기 조선의 농업-식민지근대화론의 농업개발론을 비판한다’에서, 관련 사료 등을 제시하며 벽골제가 큰 규모의 저수지였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2013년 1월에는 이영훈 교수가 경제사학(53호)에 실린 논문 ‘혼란과 환상의 역사적 시공-허수열의 일제초기 조선의 농업’에서는, 벽골제가 방조제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게재하였다.

농림수산식품부가 2009년 11월에 발간한 ‘간척백서’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첫 간척사업은 1235년 고려시대 강화도에 세운 연안(沿岸)제방이다. 이곳은 몽골군의 침입을 막는 동시에 그 안쪽으로 간척지에서 농산물을 생산한 것이다. 이어서 1248년 평안도 청청강 하구에 방조(防潮)제방이 건설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방조제(1,611개) 중 최대 규모는 새만금으로 총 길이는 33.9km, 밑넓이가 평균 290m(최대 535m), 높이는 평균 36m(최대 54m)에 달하고 있다. 이는 세계 기네스월드레코드에 등재되었으며 방조제 높이는 1천년 만에 한번 오는 파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벽골제의 북쪽 대극포(大極浦)에는 조류의 흐름이 격심해서, 공사의 어려움이 있어 먼저 방축을 쌓아 그 기세를 죽이는 해수방지를 사전에 실시한다는 기록을 참작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벽골제는 최초 축조시점부터 1143년 무렵까지 직간접적으로 바닷물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벽골제 가까운 곳의 해수면 저하에 따라 현 하구 쪽으로 바닷물이 후퇴한 사실을 간과해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벽골제 둑 쌓기 DNA가 후손들에게 이어져 제방 길이를 10배 이상 확장하여 세계적인 새만금으로 완성해낸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 앞으로 벽골제가 축조 당시에 저수지인가 방조제인가는 해당 전문가들이 역사적인 기록과 첨단과학기법을 동원하여 사실을 밝혀내겠지만, 어떠한 결과가 나와도 찬란한 농경문화의 유산임에 틀림없다.

김양식<국립김제청소년농업생명체험센터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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