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을 아시나요?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을 아시나요?
  • 이흥재
  • 승인 2013.08.12 21: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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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레핀대 교수를 지낸 변월룡이란 화가가 있다. 그가 그린 근원 김용준 초상을 보면 마치 주인공 김용준 선생이 작품을 들고 감식하고 있는 모습을 직접 보는 듯 살아있는 느낌이 든다. 특히 이마 주름의 표현이나 빛이 안경에 반사하는 묘사는 김용준 선생의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인 것 같다.

옛 레닌그라드였던 상트페데르부르크에 있는 레핀대학은 모스크바에 있는 수리코프 미술대학과 함께 러시아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최고의 미술대학이다. 이 대학 이름은 각각 러시아를 대표하는 일리아 레핀(1844~1930)과 바실리 수리코프(1848~1916)에서 따온 것이다. 레핀은 제정 러시아의 화가로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적 내용을 담은 그림을 그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선구자로 꼽히며, 인물 풍속화에 많은 걸작을 남긴 인물이다. 소수민족 출신의 한인 변월룡이 레핀미술대학 교수를 했다는 것은 그가 사실주의 묘사의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은 천재 화가였다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을 것이다.

변월룡은 평생을 소련 땅에 살면서도 자신이 한국인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소련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정신적 삶은 철저히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당시 고려인들이 흔히 하듯 ‘니콜라이 박’이나 ‘한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가 아닌 변월룡이란 한국이름을 죽을 때까지 고수했으며, 자신의 그림에 항상 한글로 사인을 해서 자신이 한국인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의 유언대로 무덤 비석에도 한글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국식 성에다 러시아식 이름을 절충하면 왠지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 것 같다고 싫어했으며, 자신의 작품에다 한글 서명을 하면 묘한 자긍심 같은 것이 생겨 가슴이 뿌듯했다고 한다. 당시 소련은 소수민족 말살을 위해 러시아어 외에 다른 나라 언어 사용을 탄압했으나, 그는 결코 이에 굴하지 않았다.

변월룡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난 운명으로 평생을 러시아를 무대로 활동했다. 천부적 재능과 부단한 노력으로 러시아 최고의 명문인 레핀미술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1951년에는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레핀미술대학 정교수까지 올라갔다. 항상 미소 짓는 부드러운 인상과 조용조용한 말투, 몸에 밴 예의와 겸손한 태도는 다른 사람에게 늘 호감을 주었다. 부드러운 그의 인상과는 반대로, 필력에는 힘이 넘쳤으며, 묘사는 빠르고 정확했다고 한다.

1953년 그는 북한당국 초청을 받아 남북휴전협정이 거의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에 평양에 건너갔다. 그리고 1년 3개월가량을 북한에 체류하면서 평양미술대학 설립과 함께 그 대학교수들을 지도하고 육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렇게 천재화가 변월룡은 북한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침으로써 북한미술의 토대를 이루었으며 평양미술대학 설립의 실질적인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 기간에 북한의 전설적인 문화예술인들과도 폭넓은 교류를 했다. 변월룡이 직접 만나 그림으로 승화시킨 인물들로는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를 비롯하여 새박사로 유명한 김일성종합대학 원홍구 박사,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 민촌 리기영, 한설야, 화가이자 수필가로 유명한 근원 김용준, 연극배우 박영신, 미술이론가 한상진 등 숱하게 많다.

그중에서도 근원 김용준은 해방 직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교수와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했고, 6·25전쟁 때에는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임시 학장을 지내다 인민군 후퇴 시에 월북했다. 「근원수필」로 유명한 김용준은 동양화를 공부하다 일본으로 유학간 뒤에는 유화로, 귀국 후에는 동양화로 전환했다. 동양화와 유화를 넘나들다 다시 동양화로 들어선 데는 동양화에서 더 깊은 철학적 깊이와 경지를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변월룡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했던 화가는 렘브란트였다. 「근원 김용준」, 「민촌 리기영」의 인물화에서는 암갈색의 중후한 배경이나 어두운 톤과 인물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것 같은 강조에서 렘브란트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렘브란트는 변월룡에게 롤모델이나 다름없었다. 렘브란트는 키아로스쿠로라는 명암법을 써서 광원의 설정, 빛과 그늘의 묘사를 통해 극적인 효과를 연출했다. 변월룡의 근원 김용준의 인물화에서는 작품을 들고 쳐다보는 표정과 안경에 반사된 빛으로 명암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어 연극의 한 장면 같은 생생함이 묻어난다.

그는 우리나라 화가로는 단원 김홍도를 제일 좋아했고, 특히 「씨름」을 단연 최고작으로 꼽았다. 덧칠이나 군더더기가 전혀 없고 척척 그은 선에 사람들의 온갖 희로애락의 표정이 살아있다고 그는 말했다. 「씨름」 구성의 압권은 구경꾼들 모두 삥 둘러앉아 씨름하는 두 사람에게 집중하게 하여 긴장감이 감도는 원형 구도에, 오로지 엿 파는 데만 관심을 두는 엿장수를 배치해 그 긴장감을 완화했다는 것이다. 변월룡은 단원 김홍도의 「씨름」을 ‘긴장과 이완’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걸작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이런 변월룡을 작품을 통해 직접 만날 기회가 있다. 바로 전북도립미술관 “역사 속에 살다-초상, 시대의 거울” 전시이다. 조선 말 전통 초상화의 대가 석지 채용신의 초상화들과 변월룡의 「근원 김용준」, 「민촌 리기영」의 서양 인물화, 그리고 현대 작가들의 다양한 인물화들이 대하드라마처럼 유장하게 펼쳐져 있다.

이흥재<전북도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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