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식 범죄 그리고 저녁이 있는 삶
‘묻지마’식 범죄 그리고 저녁이 있는 삶
  • 김형준
  • 승인 2013.08.11 14: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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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발생하여 시민들을 두려움을 떨게 했던 ‘묻지마’식 폭행사건이 전주시 도심 한복판에서도 발생해 충격을 주고 있다고 한다. 더욱이 이번 ‘묻지마’식 폭행사건의 피해자인 50대 남성이 사건 이후 지금까지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등 중태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17일 새벽 1시16분께 전주시 인후동 한 노상에서 3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용의자가 택시에서 갑자기 내린 뒤 인근을 지나가던 3명의 일행 가운데 피해자인 A씨의 얼굴을 아무런 이유나 시비도 없이 주먹으로 때리고 현장에서 도주했다고 한다. 용의자는 아직 검거되지 못한 상태로 경찰에서도 긴급 수배전단을 배포하고 검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최근 들어 전국적으로 이런 식의 ‘묻지마’식 폭행, ‘묻지마’식 범죄가 자주 발생하고 그 피해 정도도 매우 심각하여 점점 사회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묻지마’식 범죄는 피의자와 피해자와의 관계에 아무런 상관관계가 존재하지 않거나, 범죄 자체에 이유가 없이 불특정의 대상을 상대로 행해지는 폭행, 살인, 방화 등의 범죄 행위를 말한다. 큰 사회적 충격을 준‘묻지마’식 범죄를 살펴보면 10년 전 192명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대구지하철방화사건’, 2008년 ‘논현동 고시원 방화 살인사건’ 등을 들 수가 있다. 두 사건 모두 막연히 세상에 대한 불만을 자신과는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화풀이’ 범죄들을 일으킨 것으로 너무도 단순한 원인(?)이었지만 그 결과는 매우 참혹한 비극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묻지마’식 범죄가 늘어나는 것일까? 과거 묻지마식 범죄는 대부분 일부 정신질환을 아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문제였다. 누군가가 자신을 해친다는 피해망상이나 환청에 시달리는 조현병 환자들의 경우 간혹 예측 불가능한 돌발 행동을 볼 일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계를 살펴보면 이런 정신질환자에 의한 범죄율은 오히려 일반인의 범죄율보다 매우 낮은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최근의 이런 문제가 증가하고 있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사회적 분위기와 연관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IMF와 세계경제위기 이후 장기간의 경제적 불황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 실업, 실직, 사회 안정망의 부재 등 뉴스미디어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런 단어들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좌절감과 무기력감을 느끼는 듯하다. 결국, 탈출구를 찾지 못한 사람의 사회적 욕구들이 점점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빼앗아가고 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좌절된 욕구는 분노를 만들게 되고 이것이 공격성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한다. 이런 공격성이 다른 사람에게 투사될 때 폭력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공격성이 자신을 향하게 되면 바로 자살로 이어지게 된다. 세계 1위의 자살률을 보이는 한국 사회의 문제와 ‘묻지마’식 범죄가 증가하고 있는 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사실 하나의 원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핵가족과 일인 가구의 증가처럼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이 해체되는 점도 이런 문제의 또 다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가족은 성숙한 대인관계를 배우는 학교이자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조절할 수 있는 훈련장이라 보고 있다. 하지만, 바쁜 부모와 학업으로 더 바쁜 자녀들, 낮은 출산율이 보여주듯 함께 어울리고 정을 나눌 형제의 부재 등 점점 우리 가족은 그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이러다 보니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인성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로 나오고 있고 크고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좌절하고 분노감에 휩싸여 결국 자살 혹은 ‘묻지마’식 범죄로 이어지는 것이다.

 작년 대선과정에 어느 정치인이 ‘저녁이 있는 삶’이란 슬로건을 내걸어 깊은 울림을 준 적이 있었다. 적어도 저녁 한 끼는 가족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이해하고 바라봐 줄 수 있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우리의 삶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아파하고 화를 내고 있으며 이것이 타인을 향할 때, 혹은 나 자신을 향할 때 ‘묻지마’식 범죄와 자살로 이어지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욕구가 실현될 수 있는 많은 일자리와 튼튼한 사화안정망도 중요한 일이며, 가족의 복원이라는 정신적 가치의 회복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김형준<신세계병원 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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