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활동 남은건 병마와 좌절뿐…”
“예술활동 남은건 병마와 좌절뿐…”
  • 송민애 기자
  • 승인 2013.08.08 17: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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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최고은을 막아라] 2 - ①

 2011년,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였던 고 최고은씨의 사망사건을 계기로 일명 ‘최고은법’이라 불리는 ‘예술인복지법’이 제정됐다. 그리고 지난 2012년, ‘예술인복지법’이 본격 시행되고 이를 수행할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설립됨에 따라 예술인의 처우 개선에 대한 기대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과연 예술인들의 열악한 처우와 환경은 나아졌을까. 그러나 본보 취재 결과, 안타깝게도 여전히 많은 예술인이 열악한 환경 속에 놓여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예술인들이 가난 혹은 병마와 사투를 벌이며 힘겹게 예술혼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본보는 문화예술인들의 현실을 재조명해 그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왜 나한테…,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요.”

도내에 위치한 모 대학병원. 그곳에 들어서자 병원 특유의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찌른다. 병원 안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각자의 사연을 안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다양한 삶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조금 발길을 옮겨 찾은 암병동. 삶과 죽음의 교차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 평온하다. 그러나 삽시간에 무거운 침묵이 온 몸을 감싼다. 이곳에서 만난 연극인 A씨는 이러한 환경이 익숙한듯 덤덤한 얼굴이다. 이미 수년 동안 병원생활을 반복해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허나, 투병의 후유증으로 퉁퉁 부은 얼굴은 무심한듯 하지만 모처럼의 손님 맞이가 싫지 만은 않은 기색이다.

그는 ‘뇌종양’ 환자다. 입원과 퇴원, 수술과 항암치료라는 지루한 투병생활을 반복한 지도 벌써 5년째다. 사실, 아프기 전까지만 해도 A씨는 지역문화예술계에서 인정받는 연극인 중 한 명이었다. 대학 시절 우연히 연극과 인연을 맺은 그는 이후 연극에 미쳐 연극만 바라보고 살았다. 연극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애정으로 연극생활을 시작, 동료 연극인들과 함께 극단을 창단하기도 했다. 동료들의 말에 의하면 당시 그는 그야말로 연극에 미쳐 있었다. 동료들 조차도 그의 지독한 연기열정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무대에 올라도 지긋지긋한 가난의 굴레는 벗어날 수 없었다. 오히려 활동을 하면 할수록 배를 굶주리는 일이 허다했다. 결국 그는 ‘연극’을 하기 위해 어떤 일이라도 해야 했다. 우유배달을 비롯해 신문배달, 자장면배달, 구두닦이, 막노동 등에 이르기까지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다. 연극을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야 밥 한 숟갈이라도 먹고 무대에 오를 수 있으니까…. 그러나 A씨는 “새벽의 찬바람을 맞아도, 라면으로 하루의 끼니를 때워도 그저 연극을 할 수 있어 행복한 날들이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연극과 함께했던 그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한창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2009년, ‘악성 뇌종양’이라는 청천벽력같은 판정을 받은 것. 그렇게 비극의 그림자는 서서히 그의 목을 옥죄어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병마는 A씨에게 많은 것을 앗아갔다. 2009년 첫 수술 후에는 그 후유증으로 걸음조차 제대로 걸을 수 없게 됐으며, 2011년 두 번째 수술 후에는 청력마저도 상실했다. 당시 의사는 그에게 “1년 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내리기에 이른다. 배우에게 청력상실은 사형선고나 다름 없는 일. 그렇게 침묵의 방에 갇힌 A씨는 “청력을 상실했을 당시에는 정말 큰 좌절감이 밀려왔다. 이제는 배우로서의 활동을 할 수가 없게 됐으니 말이다. 사람들과 의사소통조차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연기를 하겠냐”면서 “판소리를 참 좋아했는데, 이제는 그 소리도 영영 들을 수 없다….”고 얘기했다. 청력을 상실한 이후 그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글 뿐이다. 그래서 그의 병상에는 언제나 수첩과 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시력마저도 점차 저하되고 있다는 것이다.

병마가 앗아간 것은 그의 청력과 시력 그리고 건강한 몸 뿐만이 아니다. 병마는 그의 꿈과 희망 그리고 삶에 대한 의지마저도 야금야금 앗아가고 있다. “40대면 한창 활동할 나이인데 이렇게 병실에만 있으니 답답하고 힘들죠.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전혀 할 수가 없으니 말이죠. 병이 나아진다는 보장도 없으니 정말 막막합니다. 도대체 왜 저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걸까요…?”

뿐만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은 그를 점점 더 절망의 늪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의 오랜 친구인 L씨는 “현재 A는 혼자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다. 거동도 혼자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소리도 듣지 못한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옆에서 보살펴줄 간병인이 필요하다. 그런데 가족이라고는 아버지 뿐인데, 아버지 역시도 70대 노인인데다가 경제적으로 어려워 도움을 주기가 힘든 상황이다”며 “다행히 병원비야 이전에 보험을 하나 든 게 있어 그것으로 충당하고 있지만, 간병비나 생활유지비 등은 큰 어려움이다. 병으로 인해 일을 못하니 수입이 전혀 없어 이를 해결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지금이야 주변 문화예술인들이 도움을 줘 간신히 간병인을 두고 있지만 언제까지 그들에게 기댈 수는 없는 일 아닌가”라고 밝혔다.

이에 안상철 전주전통문화관 관장은 “예술인이 예술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생계보장 혹은 긴급한 상황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는 많은 예술인이 생계보장이 안 돼 다른 일을 해야만 하는 실정이다”며서 “특히 A의 경우 연극활동만 하다 병을 얻었는데, 이에 대한 지원이 없으니 앞으로 살 날이 막막한 상황이다. 따라서 예술인들이 예술활동을 하다 사고를 당하거나 못하게 될 경우 국가나 사회 차원에서 지원해주는 방안이 반드시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20여년이 넘는 연극활동 끝에 A씨에게 남은 것은 ‘가난’과 ‘병마’다. 이는 비단 A씨 만의 문제는 아니다. 예술인들의 처우가 개선되지 않는 한 어느 예술인이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그의 수첩에 적힌 “연극을 더욱 열심히 못한 게 후회돼요”라는 글이 유난히도 가슴을 후빈다.

송민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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