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키온의 시간 여행
타키온의 시간 여행
  • 원용찬
  • 승인 2013.08.0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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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는 언제나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간다는 생각은 빛보다 더 빠른 타키온(tachyon)이라는 가상의 입자를 가정하면 때로 부정된다고 한다. 타키온의 우주 세계에서는 미래와 과거는 서로 순식간에 왕복할 수도 있다. 엊그제 만주벌판을 가로지르는 밤 열차는 타키온이 이끄는 시간여행이었다. 과거 고단했던 우리들의 60년대 풍경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중국 동북 삼성의 목단강과 징푸후(鏡泊湖)는 남북국 시대를 열었던 발해 역사가 아직도 깊은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중국에서 세미나를 끝내고 배낭 하나 달랑 맨 채로 빽빽한 열차 칸에 쭈그리고 앉아 있자니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내민다. 하긴 이것이 여행이다. 자유가 그리워 떠났던 여행길에서 헤매다가 어느덧 자유에 지치고 고향이 그리워서 되돌아오는 것도 여행이겠다. 여행은 돌아올 곳이 있어 떠나는 것이지만 방랑은 그러지 못하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확인하는 작업도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다.

 호머의 그리스 서사시 『오디세이아』도 어찌 보면 삶의 여행기라 할 수 있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었던 오디세우스가 10년 동안의 싸움을 마치고 다시 10년 동안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걸렸던 험난한 시련도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이었다. 그리스 시인 콘스탄틴 카바피는 오디세우스의 귀향 모험을 ‘이타카’라는 시로 재구성하였고 나도 조금 바꿔서 일부만 옮겨 본다.

 고향 이타카는 너에게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 / 이타카가 없었다면 네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니 /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 /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현자가 되었으니 비로소 삶과 고향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었구나.

 여행은 고향이 선물한 삶의 소중한 가르침이다. 때로 갑갑하고 싫어서 떠났던 고향은 여전히 너를 반긴다. 여행길에서 삶은 달걀 하나를 건네는 이방인이 나에게는 현자였다. 그리고 너무나도 가까웠기에 때로 사랑과 미움으로 엉킨 가족과 친구들이 정작 내 삶을 이끌어온 현자들이었음도 그리움과 함께 깨닫는다.

 몇 년 전인가 중국의 고원지대 샹그릴라에서 티베트에 들어가려다 갑작스레 취소하고 아무 버스나 잡아탄 것이 나를 타임머신처럼 과거로 이끌었다. 버스 지붕에는 짐이 가득하고 운전석 옆에는 커다란 담배 재떨이가 버티고 있었다. 어느덧 꼬불꼬불 시골길로 접어드니 장날이었다. 허름한 농부가 막대기로 돼지들을 몰고 장터로 들어가고 소수민족인 나시족 여인들이 산에서 캐온 버섯을 팔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우리들의 50년대 풍경을 그리움처럼 맛보기도 했다.

 언젠가 온종일 지붕의 환기통이 열린 만원버스를 타고 태국의 치앙콩에 도착하여 라오스 국경까지 들어갔다. 거기서 다시 황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메콩강에 몸을 맡기고 1박 2일 동안 거슬러 올라갔다. 마음은 히말라야의 눈 녹은 물들이 발원하는 물줄기를 따라가고 있었다. 길 가다가 도근점을 발견할 때의 반가운 마음처럼 근원에 대한 그리움도 가득하였다.

 삶은 타키온으로 가득 차있는 우주와도 같다. 첫 용기를 내고 까뮈의 말처럼 부조리한 일상에 조그만 반항만 한다면 우리는 언제든 공간을 바꿔 새로운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만날 수 있다.

 경제학이란 학문은 미래에만 초점을 맞춘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정연하게 계산 가능한 합리적 질서이며 원인과 결과가 인과응보적인 논리에 따라 전개되어야 한다. 내일을 위해 오늘 근검절약하고 인내로서 참아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고 지금과 같이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시대에 맞아떨어지지도 않는다. 오직 내일을 위해 살다 보면 오늘이란 시간은 내일을 위해 헌납되는 희생의 시간일 뿐이다. 현재의 시간이 아무런 의미 없이 오직 미래 때문에 사라지는 것을 혹자는 시간살인(tempocide)이라고 부른다. 현재에 의미를 찾고 오늘에 충실한 까르페 디엠(carpe diem)은 여행길에서 나를 안내해줬던 나침반이었다.

 내일의 미래 경쟁력을 위해 아이들을 사설 해병대 캠프에 넣어 단련시키다 사고를 당한 이번 여름의 비극적 모습이 아직도 눈에 어른거린다. 그냥 자녀들에게 배낭 꾸려주고 여행길을 만들어줘서 낯선 것에 가슴 설레고 나를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일이 진정한 도전과 창조 교육이 아닐까. 공간을 바꾸면 시간이 바뀌고 생각이 새로워진다.

 그나저나 아직 먼지 묻은 배낭을 털지도 못했는데 또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도대체 그리움의 정체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게 삶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일단은 타키온의 바이러스가 2학기 강의실을 가득 채울 수 있으면 좋겠다.

 원용찬<전북대 상과대학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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