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천 송수남 선생님의 갑작스런 서거에…
남천 송수남 선생님의 갑작스런 서거에…
  • 이흥재
  • 승인 2013.07.08 19: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6월 8일 청천벽력처럼 홀연히 가셨다. 이제 한 달 정도 시간이 흘렀지만, 전주나 서울에서 미술관계 인사들을 만나면 갑작스런 부음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면서 생전의 일화를 떠올리곤 했다. 엊그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계시는 김병종 교수를 만나 뵈었다. 고향인 남원에 김병종미술관 건립에 관한 일로 내려오신 길이라고 했다. 만나자마자 첫 마디가 “남천 선생이 어떻게 그렇게 갑작스럽게 가실 수가 있어요? 정말 정 많고 호방하고 작업에 대한 열정 하나로 우리나라 미술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는데…” 하면서 안타까움에 어쩔 줄을 몰라 하셨다. 호탕해서 술 좋아하고 많은 분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미술계 원로들이 최근에 한꺼번에 여러분이 가시고 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스럽다며 연신 생전의 모습에 대해서 얘기를 하셨다. 특히 남천 선생이 퇴직 후 고향 전주에 내려와 사신 것처럼 김병종 교수님도 남원에 미술관이 만들어지면 자주 내려와 있으면서 지인들도 만나고 지역 미술계 젊은 작가들과도 적극 교류를 하며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토로하셨다.

 이번 남천 선생님의 갑작스런 작고 소식을 접하면서 원로 선생님들은 언제 어떻게 가실지 모른다.

 기회가 있으면 미루지 말고 초대전 등 자주 만남의 자리를 만들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광수 원로 미술평론가의 남천에 대한 글을 인용해서 다시 한 번 남천 송수남 화백의 삶을 돌아보자.

 ‘남천’하면 무엇보다도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80년대 수묵화 운동이다. 수묵화 운동은 많은 젊은 한국 화가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어 한 시대의 미술의 흐름을 집약해 낸 운동이었다. 수묵화 운동의 방법에 특이한 점은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일종의 데몬스트레이션이었고 동시에 축제적인 퍼포먼스의 양상을 띠었다는 것이다.

 전시를 이끄는 주최 측이나 이를 바라보는 객체 쪽에서나 다 같이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는 데 그 독특한 면모를 보여 주었다. 이 같은 전략은 남천의 뚝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며 확고한 신념과 비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남천 송수남이 중심이 되었던 수묵화 운동과 그를 통한 수묵화에 대한 신앙에 가까운 집념을 보였던 그의 작가적 의지는 우리 미술사에 지울 수 없는 하나의 발자취로 길이 남을 것이다.

 작년 2012년에 우리나라 단색화 운동의 선구자였던 박서보 선생님이 전주에 여러 번 내려오셨다. “채용신과 한국의 초상 미술” 전시를 보러 오셨고,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의 “한국의 단색화” 전시에 작가 특강 때 등 내려오실 때마다 남천과 함께 식사를 하며 반주를 곁들였다. 그러면서 항상 동행을 했던 저에게, “남천이 전주에 내려온 것은 전북 사람들 복이다!”라며 옛날 비슷한 시기의 단색화 운동과 수묵화운동 당시의 얘기도 꽃을 피우곤 했었다.

 지난 3월의 전북도립미술관 “1980년대 예술운동 현장의 작가들” 남천 송수남 전이 선생의 생애 마지막 전시가 되었다는 중앙일보 미술부 권근영 기자와의 이야기가 정말 실감이 났다.

 전주에 내려온 후 처음 전시에 수묵에 색동무늬를 더했었다. 수묵에 오방색의 색동이 바로 전주라는 전통의 색을 더했다고 볼 수 있겠다. 오래 사셨더라면 남천 선생의 그림세계에서 말년 전주 낙향 이후의 그림 경향이 또 하나 더해졌을지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어왔던 얘기가 있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80리까지 뻗어 드리운다. 나무는 큰 나무 덕을 못 보지만 사람은 그 사람 덕을 본다고 한다. 남천 송수남 선생이 조금 더 오래 사셨더라면 전북의 작가들과 우리들에게 더 큰 그늘을 드리우며 덕을 베풀어 주셨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끊이질 않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흥재<전북도립미술관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