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죄와 벌
현대판 죄와 벌
  • 김승연
  • 승인 2013.07.02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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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서구나 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 짧은 역사를 가지고도 과학은 물론, 문학과 예술 분야에 괄목할 만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나라이다. 과학의 경우 탄탄한 기초과학은 물론, 첨단 핵물리학이나 우주과학과 그 기술은 지금은 미국보다 뒤졌다지만 옛날에는 훨씬 앞섰다. 예를 들어, 미국은 1969년에 닐 암스트롱이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착륙하는 기적을 이뤘다. 그러나 러시아는 그보다 이미 8년 전인 1961년에 보스토크 1호에 유리 가가린을 태워 우주궤도를 비행한 후 왕복케 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어디 과학뿐인가? 음악은 어떻고. 서구 사회가 배출한 고전, 낭만, 바로크 시대의 수많은 음악가들이 있지만, 러시아의 대표적인 음악가 차이코프스키는 삼척동자라도 그의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유명한 음악가이다. 그 이유는 전 세계의 모든 경연대회 중에 가장 유명한 콩쿠르가 바로 차이코프스키 음악경연대회이기 때문이다.

어디 음악뿐인가? 문학은 어떻고. 러시아 문학의 두 거장 하면 단연 톨스토이와 도프토예프스키이다. 그 두 사람을 빼놓고는 러시아 문학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특히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오늘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죄와 벌의 경우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무신론자이며 서구적인 합리론자이었다. 그는 그 시대에 빈곤에 허덕이며 고독에 빠진 민중들을 상대하여 고리대금업을 하는 늙은 자를 민중의 적으로 간주하고 증오한다. 이유는 그 고리대금업자가 가난한 민중의 피를 빨아 먹는 한 마리의 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정의감과 의협심에 불탄 나머지 정의의 이름으로 그 노파를 죽이고 만다. 그러나 주인공은 성스러운 매춘부 소냐의 끈질긴 권유를 받아들여 자수한 후 구속되어 시베리아 감옥으로 끌려가 수감된다. 소설에서의 소냐는 복음적인 사랑과 인종적인 사도로서 무신론자인 라스콜니코프와 대립하는 구원의 사람으로 묘사된다. 결국 주인공은 매춘부 소냐의 설득에 감화 감동되어 종교적인 회개를 통해 정신적인 부활로 승화한다. 어디 가난한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이 그 때만 존재했던가? 아니다. 지금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 때는 한 마리 기생충이었다면 지금은 많이 번식하여 온 세상에 득실거린다.

옛날 조선 역사를 보면 충신은 귀향을 가고 역적은 높은 자리에 오르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오늘 도 보면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죄를 지어 벌 받아야 할 사람은 상을 받아 높은 자리에 오르고, 선한 일을 하여 상 받을 사람은 벌을 받아 퇴출되거나 감옥에 가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들이야 성공과 출세를 향한 끝없는 욕구이었다면 힘없는 백성들은 생존의 문제 앞에 꺼져가는 등불과 상한 갈대처럼 미약했다. 그런데 그런 조선시대에 선왕들이 있었다. 바로 신문고(申聞鼓)를 만든 왕이고, 선대가 만든 그 제도를 버리지 않고 운영한 왕이다. 태종은 대궐 밖에 신문고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 제도가 영조까지 이어진다. 당시 백성들이 임금에게 상소, 고소하는 일이 제도화되어 있었지만, 탐관오리들이 그런 제도를 제대로 운영할리 만무했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상소나 고소는 도중에 막아버렸다. 그리고 그런 선량한 백성들을 탄압했다. 그 결과 백성들의 소리를 들어야 할 임금의 귀는 막혀버렸다. 그래서 태종은 백성들 중에 억울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대궐 밖에 있는 신문고를 치면 임금은 그 소리를 듣고 억울한 백성을 직접 만나 그의 사연을 듣고 해결해주는 아름다운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이 아름다운 제도가 쇄국정책을 했던 흥선 대원군 때 폐지되고 말았다.

어디 그 뿐인가? 정조는 행차할 때 누가 북이나 꽹과리를 치면 멈추고 서민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사연을 듣고 현장에서 해결해주기도 했다. 그런 의미로 보면 우리나라 임금들 역시 이스라엘 왕으로 그의 지혜가 전무후무한 솔로몬의 재판만큼이나 지혜로웠던 것 같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한 것이다. 그래서 법원에 서있는 정의의 여신 양손에는 칼과 저울이 들려있다. 그런데 과연 오늘의 법은 정의의 여신 손에 들려진 칼처럼 정의의 칼이며, 그의 손에 들려진 저울처럼 정확한 저울인가? 만약 그렇다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왜 생겨났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최초의 율법서인 모세 5경 중 신명기서에는 “내가 그 때에 너희 재판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너희 형제 중에 송사를 들을 때에 양방 간에 공정히 판결할 것이며, 그들 중의 타국인에게도 그리 할 것이라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일반으로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신명기 1:16~18)고 하였고, 레위기서에는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레위기 19:35~36)고 했다. 뿐만 아니라, 전무후무한 지혜의 왕으로 세기의 재판장이었던 솔로몬은 그의 잠언에서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잠언 17:23) 하고 경고했다.

이제라도 제발 죄는 벌하고, 선은 상주는 제대로 되는 세상이 왔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들은 두 눈을 뜨고 밤낮으로 지켜보고 있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안심하고 사는 세상이 될 테니까.

김승연 <전주서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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