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비(詩碑) 시비(是非)
시비(詩碑) 시비(是非)
  • 이동희
  • 승인 2013.06.25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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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전주시에서는 ‘아트 시티-Art city’라는 주제 아래 다양한 예술도시 가꾸기 정책을 전개하였다. 그 일환으로 시내버스 승강장마다 지역 시인들의 작품을 시화로 제작-게시하여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시를 감상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많은 시민들이 활용하는 공적 공간을 상업주의적이고 정책 중심의 홍보에서 벗어나 예술의 색깔을 입히려는 시도는 시인들은 물론 다수의 시민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그 뒤 시화 관리에 소홀하고 시들해져 어느 곳은 아예 찢겨 나가고, 어느 곳은 시화 위에 불법 무단 광고물이 덮여 흉측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온 도시를 광고전단으로 도배하는 광고업자들의 불법행위도 문제지만, 일단 게시한 다음 지속적으로 관리하지 않고 무신경하게 방치한 행정도 문제다. 하루빨리 시내버스 승강장에 게시된 시화가 예술도시의 면모에 누가 되지 않도록 재정비를 서둘러야 하겠다.

서울 지하철역 안전방호 유리창에도 시가 게시되어 있다. 이곳의 시는 서울 출신만이 아니라 전국 시인들의 작품으로 서울이 서울만의 도시가 아니라 한 나라의 수도요 중심도시임을 과시하는 점은 바람직하다. 어쩌다 서울 나들이에 지하철역을 들를 때는 먼저 시를 찾아서 읽으며 지하철을 기다리는 무료를 달래곤 한다. 맑은 유리창에 새겨진 한 편의 시는 도심의 피로에 찌든 승객들에게 짧으나마 위로가 되기에 충분하다.

서울 지하철역 공사는 도시에 예술을 입히는 방법을 아주 간편하면서도 효과 있게 전개하는 셈이다. 시의 내용에서 받는 감동도 감동이지만, 낯설고 길 설은 대도시의 공간에서 만나는 한 편의 시는 여행객이 당하는 마음의 갈증을 달래주기에 충분하다. 돈이 되는 상업광고물의 현란한 색채의 혼란 속에서, 돈이 되지 않는 시가 무색의 유리창에 하얀 페인트로 새겨져 있다. 결코, 시의 무채색이 광고의 화려함에 지지 않는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잠깐이나마 맑은 기운이 정신에 삼투하는 느낌은 필자만의 것이 아닐 것이 때문이다.

전남 장성군에 소재한 장성호 주변에 <시비공원>이 있다. 공원 면적이나 작품 수준과 규모로 보아 결코 손색이 없다. 여기에 비치된 시 작품들은 시대와 지역과 국경을 초월한 명작들의 집대성이다. 더구나 그냥 시만 새겨둔 것이 아니라 현대 조각가들이 시를 형상화한 조각 작품을 곁들여 그 아치가 범상치 않다. 명시는 조각 작품으로 인하여 그 시향을 더욱 짙게 하고, 조각 작품은 시를 바탕으로 빼어난 조형미를 과시하고 있어서 하는 말이다.

모든 예술은 ‘심미적 정신력을 고양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조형예술인 조각이 언어예술인 시의 정신을 형상함으로써 그 조형성에 피를 돌게 했다면, 언어에 의존해야 하는 시가 조각의 몸을 빌어서 그 추상성에 몸을 얻은 형국이다. 정신의 시가 몸의 조각을 만나 심미적 정신력을 고양하는 데 상생의 예술혼-예술미를 발휘하는 셈이다.

이 시비공원을 돌아보면서 먼저 엄청난 비용에도 기초단체에서 이루어낸 성과라는 점에서 놀랐고, 또 하나는 이처럼 아름답고 의미 있는 시비-조각 작품들이 보다 많은 시민들이 왕래하는 도심에 자리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었다. 이를 추진하려는 지자체나 시민들이 발상을 전환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몇 년 전, 우리 고장 어느 원로 시인의 시비를 시인이 거주하는 지역의 공원에 세우려다 실패한 적이 있다. 문인들이 자체적으로 시비건립위원회를 구성하고, 십시일반 성금을 거두어 기금까지 마련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시에 시비 세울 공간을 요청했다. 그러나 시행정당국은 의회의 제지를 빌미로 미루기만 하고, 의회는 또 명확하지도 않은 시민들의 여론을 방패 삼아 시비 건립을 저지하였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은 거두어진 성금을 되돌려주어야 했으며, 그 원로 시인은 그런 참담한 실정을 목격하다 곧 명운을 달리하였다.

혈세의 알뜰한 집행도 필요하고, 시민들의 여론도 중요하다. 그런 장애를 뚫고 예술도시로 가꾸어가기 위해 버스승강장에 시화를 게시하고, 지하철역에 시를 게시하며, 우람하고 아름다운 시비공원을 대규모로 조성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시급한 일은 문화-예술의 진흥을 상업적 이해타산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사고의 천박성을 청산하는 일이 우선이다. 정신문화의 못자리인 시문학-시인의 작품을 가장 번화한 도심에 시비(詩碑)로 세워도 시비(是非)를 걸지 않는 시민정신만이 한 도시를 사람다운 품격을 갖춘 예술의 도시로 거듭나게 할 수 있다.

이동희<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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