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가로수
소나무 가로수
  • 진동규
  • 승인 2013.06.24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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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가로수를 만났다. 어느 도시엘 가나 가로수가 있게 마련인데 고창의 가로수는 꽃도 없고 단풍색도 없는 소나무다.

진해 벚꽃은 그 꽃으로 피는 시기부터 신문의 기사 감이다. 한두 송이 피어나면서부터 지는 모습까지 화려한 꽃이다. 해군의 군항제가 거들어 도시가 출렁거린다.

전주의 은행나무는 그 노란 낙엽으로 명성을 얻었다. 자르지 않아 저 크고 싶은 대로 시원스럽게 자란 풍모로 호감을 끌어냈다. 담양의 메타세쿼이아는 외래종인 것이 지역을 대표하는 주역으로 자리를 굳혔다. 영화 ‘화려한 휴가’가 오버랩되면서 짙은 인상을 남겼다. 가로수는 아니지만 금강산의 금강송은 잠깐 스치는 풍경이었지만 소나무는 이런 거야 하는 의젓함이 있었다.

바다에서 밀려오는 안개일까? 고속도로를 벗어나는데 고창은 안개 나라였다. 안개는 말이 없다. 순간으로 눈앞의 세상을 지워버린다. 너와 나 사이의 거리를 지워버린다. 물상을 지워버리고 거리를 지워버리는데 시간만 흘러간다는 것인가? 공포스러운 순간이다. 시간이라고 하는 신께서는 우리에게 시간마저도 지워버리는 묵시의 순간을 묵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세상의 순환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은혜로움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맞아주는 것은 소나무였다. 성큼성큼 다가서는 소나무는 흑백영화의 필름 속을 나오는 것만 같았다. 시간 저편의 묵언의 세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무채의 세상이 아닌가! 안개와 소나무만 있는 세상이 동영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수묵 담채라니! 세상의 어느 닥종이 공예가가 있어 이렇게 부드러운 화선지를 만들 수가 있다는 말인가. 어떤 화가가 있어 농묵 담묵을 가려서 먹우림을 이끌어낸다는 것인가. 낙관은 이제 막 길을 돌아서는 놈 허리쯤 꾹 눌러주면 인주빛 참 곱기도 하겠다.

안개는 고인돌 박물관까지 우리 가마 걸음 하던 차를 놓아주지 않았다. 차 한 잔씩을 마시고 고인돌을 찾아 나서는데 사뭇 역사 탐험 길이라도 떠나는 기분이었다.

다리 하나를 건너는데 사람 세상에서 역사 세계로 건너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시간을 건너간다는 것이 꼭 이런 기분이 아닐까 하는 묘한 체험의 순간이었다. 고인돌들이 그렇게 엎디어 있었다.

천년쯤 먼저 엎드린 돌이나 오백 년쯤 뒤에 온 돌이나 그게 무슨 별것이냐고 고여진 돌 밑으로 안개구름이 잠깐씩 기척을 하는 것 같았다. 고인돌의 주인들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돌칼 하나씩을 옆구리에 차고 어느 별자리를 찾아나섰을 터이다.

방장산이 안개들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석정온천을 찾아가는 길은 소나무 가로수들이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골짜기마다 그물을 거두어들이듯 안개 자락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한 바람씩 걸쳐 있는 실오라기까지도 말끔하게 거둬들이는 것이었다. 드러나는 허리가 낭창하고 어깨선이 가히 방장산의 눈에 뽑혀올 만했다.

미인선발대회에 나서는 심사위원님들의 눈이야 수영복 엉덩이나 재고 브래지어 가슴이나 재고 무단히 허리나 훑지만 방장산은 눈썰미가 다르다. 길 양옆으로 늘어선 소나무들 사이사이 바람 지나는 바람길 솔바람 소리까지 잰다. 겨울이면 소복소복 눈꽃 받아낼 가지까지 챙긴다.

고창의 소나무 가로수는 어느 화가의 감각보다 뛰어나다. 길가로 늘어선 나무들 어느 가지 하나도 똑같은 짓을 하는 놈이 없다. 봄이면 봄, 여름이면 여름, 겨울이면 또 겨울대로 좋다. 고창 바지락 죽 한 사발 시원하게 마시면 심원 갯벌의 바지락들이 토해낸 무채의 안개가 멋진 장면을 또 연출할 터이다.

진동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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