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해역에 잠자고 있는 역사를 깨우자
새만금해역에 잠자고 있는 역사를 깨우자
  • 유병하
  • 승인 2013.06.18 1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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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사업은 지난 20여 년간 많은 어려움 속에 진행되어 왔다. 방파제 착공(1991년)을 시작으로 새만금 종합개발계획의 수립(2011년), 새만금사업 지원특별법의 제정(2012년)에 이어 올해에는 새만금개발청이 문을 연다고 한다. 이제는 지난 세월의 노고를 보상할 향후 수십 년의 꿈과 희망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으로도 ‘녹색산업’, ‘첨단산업’, ‘자족도시’, ‘레저생태’, ‘국제금융’, ‘농산업클러스터’, ‘투자유치’ 등과 같은 키워드가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개발과정을 살펴보면, 향후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질 새만금해역 내의 역사적, 문화적 자산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사정은 최근 태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난파선(難破船)만 떠올려도 쉽게 알 수 있다. 이곳의 목선(木船)에서는 무수한 고려자기(高麗磁器)와 목간(木簡)이 출토되어 높은 문화재적 가치와 함께 고려시대의 해상운송체계와 그것을 주도한 세력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였다. 비록 새만금해역과는 공간적으로 조금 떨어져 있지만 나무로 만든 목선이 유사한 해양환경을 헤쳐 나갔다는 점에서는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목선이 앞으로 새만금해역에서도 수십 차례 우리 눈앞에 드러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바다의 수장고(收藏庫)와 다름이 없다.

원래 목선으로 항해를 한다는 것은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망망대해에서는 방향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섬이나 육지의 봉우리를 표지로 항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침판을 사용하면 되겠지만 그다지 일반화되지 않았고, 더욱이 선사나 고대에는 육안(肉眼)에 의지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대부분의 목선은 대형이든 소형이든 간에 연안을 따라가면서 항해를 지속하였다.

문헌에 확인되는 것만으로도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이 길을 통해 한반도 서북 지역의 정치세력이 남부로 이동하였고, 마한(馬韓)과 백제가 중국의 여러 왕조와 고구려 등으로 사신을 보냈으며, 당(唐)과 백제, 왜(倭)가 해상에서 한바탕 쟁패를 벌이기도 하였다.

9세기 일본의 승려였던 엔닌(圓仁)이 신라인의 안내를 받아 당에서 일본으로 스쳐가기도 하였으며, 서긍(徐兢)을 비롯한 남송(南宋)의 사신들이 고려를 찾기도 하였다. 또한 고려 말에 최무선(崔茂宣)이 왜구의 함대를 물리쳤으며, 수많은 고려·조선시대의 조운선(漕運船)이 영남과 호남에서 거두어들인 세곡미(稅穀米)를 나르기도 하였다. 즉 시대를 불문하고 새만금해역은 서해안 각지를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뱃길이었고, 또한 고군산열도(古群山列島)를 중심으로 금강·동진강·만경강을 이어주는 복잡한 해상교차로 역할을 담당해왔다.

게다가 새만금해역은 조석간만의 차이가 크고, 암초도 많으며, 좁은 수로(水路)에 강이 겹쳐지면서 바닷속은 매우 복잡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또한 292명이 희생된 서해 훼리호 침몰사건(1993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북서계절풍이 불면 항해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지역이었다. 배의 구조가 취약한 목선일 경우 난파의 가능성이 매우 높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도 뻘 속에는 많은 난파선이 잠자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목선 항해의 실상을 잘 살펴보면, 난파선 이외에도 해상활동과 관련된 수많은 유적이 새만금해역 내의 섬과 해안가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목선은 야간에 항해가 불가능하였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항해를 지속하지 못하고 초자연적인 존재[神]에게 기원을 하면서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곳저곳에 부대시설이 갖추어진 포구(浦口)가 필요했음이 분명하다. 여기에는 배를 대던 선창, 배를 수리할 조선소, 선원이나 수로안내인이 대기할 숙박소, 선원들이 기도할 사찰이나 신당(神堂) 등이 갖추어져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이 곳곳에 무수한 역사적, 문화적 자산을 포함하고 있는 곳이 새만금해역이다. 현재로서는 섬이나 해안가의 선사시대 패총과 고군산열도의 고려 행궁(行宮), 신당, 관아(官衙), 산성 등이 주목을 받고 있는 정도이다.

하지만 앞으로 본격적으로 개발이 이루어질 경우, 방파제 내부의 토지와 호수에서 매립이나 준설, 천공, 파일박기 등과 같은 공사 도중에 난파선과 함께 앞서 언급한 다양한 유적들이 발견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를 대비하여 잠들어있는 역사적, 문화적 자산의 중요성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전북지역의 중요한 관광자원이며, 문화재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주민들에게 역사적 정체성을 제공할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직 방파제를 쌓아서 바닷물만 가두었을 뿐 본격적인 해역의 내부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올해 9월 ‘새만금개발청의 출범’을 앞두고 그간의 성과와 앞으로의 추진전략을 재검토하고 있다고 하니 한 번쯤 인식의 전환과 함께 새로운 방향성의 모색을 기대해볼만 하다. 하기야 ‘새만금 종합개발계획의 5대 추진전략’ 중의 하나가 ‘전북지역 고유의 역사·문화·관광자원이 부각되는 한국적 공간 창출’이었으니 초심(初心)으로만 돌아가도 될 일이다.

유병하 <국립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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