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과 단원 김홍도의 두 시선
세잔과 단원 김홍도의 두 시선
  • 이흥재
  • 승인 2013.06.02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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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이란 제목의 폴 세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의 사과가 담겨있는 왼쪽 접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시점으로 바닥이 다 드러나 보인다. 그림 가운데 있는 접시는 접시의 아랫부분이 그려져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본 시점이고, 오른편의 물병은 눈높이의 시점이다. 이처럼 이 작품에는 세 개의 시점이 나타난다.

세잔은 르네상스 이후 400여 년간 절대적으로 믿어왔던 원근법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된다. 하나의 시점인 원근법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 얼핏 사물과 똑같이 보이는 듯하나, 실제로는 눈으로 본 모습이나 눈으로 보고 싶은 모습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원근법은 시점이 하나인 사진의 원리와 똑같다. 눈의 역할을 하는 카메라 렌즈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눈은 두 개이므로 여러 시점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세잔은 끊임없는 노력 끝에 결국 다시점(多時點)을 한 폭에 구현해 내는데 성공을 했다. 세잔의 다시점의 바탕 위에서 피카소의 큐비즘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양미술사에서는 세잔을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부르기도 한다. 100여 점의 사과가 있는 정물로 마침내 파리를 정복하게 되어 아담의 사과, 뉴턴의 사과와 함께 세잔의 사과가 미술사에서는 3대 사과로 꼽힌다.

김홍도의 씨름을 천천히 살펴보자. 빙 둘러앉아 씨름판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은 한눈에 다 내려다 볼 수 있는 맞은편 높은 시점에서 그려졌다. 하지만, 씨름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은 그림 속 구경꾼들이 앉아서 올려다 본 시점으로 표현되었다. 만약 씨름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맞은편 더 높은 곳에서 사진을 찍듯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시점에서 그렸다면, 아마 난쟁이처럼 납작하게 그려졌을 것이다. 이렇듯 한 화면에 두 개의 시점이 존재하지만 씨름판의 생생한 열기가 온몸으로 느껴지면서도 조금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구경꾼의 시선을 슬쩍 빌려옴으로써 우리는 직접 씨름을 구경하는 듯한 느낌이 들고, 그림의 현장감은 더욱 고조된다.

A4정도 크기의 그림 속 스물두 명의 얼굴 표정을 보면 등장인물 모두 표정이 제각각이다. 자기편이 이기는 쪽은 환호의 웃음을 띠는 반면, 지는 쪽은 안타까운 표정이 역력하다. 표정의 핵심은 눈이다. 단원은 사람들의 눈을 가는 붓으로 점을 찍듯이 누른 다음 양쪽 바깥으로 붓끝을 살짝 삐쳐 표현하는데 인물들의 나이며 성격 그리고 그 개개인이 처한 상황까지 섬세하게 드러내고 있다.

작고한 지 200여 년이 지났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화가로 단원 김홍도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은 씨름 그림 한 점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씨름의 구도 또한 절묘하기 이를 데 없다. 관중들이 빙 둘러앉아 씨름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원형구도이다. 그리고 배경을 생략하여 보는 이의 시선을 확 끌어당기고 집중하게 한다. 이런 집중력이 지나치면 화면이 답답할 수 있으나, 오른편을 텅 비워놓고 가죽으로 만든 갓신과 짚신 두 켤레만 그려 넣고 방향도 밖으로 향하게 하고 있다. 씨름의 열기를 식히고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더벅머리 엿장수의 시선이 먼 산을 바라보듯 바깥을 향하게 한 것은 고조된 긴장감을 완화하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다.

1839년에 태어난 폴 세잔보다 단원 김홍도는 거의 100여 년 앞선 1745년생이다. 우리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익히 보아온 단원의 그림 “씨름”은 두 개의 시점으로 그려졌다. 우리가 서양보다 100여 년 앞서 다시점을 이루어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로 심지어 미술 분야에도 한국 미술이 서양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서양미술사에 나오는 화가들보다, 우리 미술사에 중요한 화가들의 이름을 낯설게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는 깊이 있게 잘 알지 못하는데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처럼 그림 한 점을 얼마나 천천히 그리고 오래 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달라져 보이는 것이다. 그림 속에는 또 하나의 세상이 창조되어 펼쳐져 있다. 우리 미술의 참맛을 알 수 있도록 자주 접할 기회가 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나아가 우리 그림과 서양화를 서로 교차해서 살펴보는 것은 우리 미술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하는데 훨씬 많은 도움이 된다고 확신한다.

이흥재<전북도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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