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와 그 시작은
창조경제와 그 시작은
  • 엄혁용
  • 승인 2013.04.25 19: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차 대전을 전후로 미술 산업의 강자의 자리는 크게 변화되었다. 시대적 상황이 무관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유럽 중심의 미술 산업의 중심지가 미국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미술가들은 세계적 규모의 창조적 가치들을 만들어 가며, 자신의 국가에서는 물론 국제 미술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 이후 유럽을 선도하던 작가들이 뉴욕으로 몰려들고, 수많은 세계의 미술학도들과 미술애호가들, 경제인들은 미국을 향해 예술적 소비문화를 옮겨가게 되었다. 현재 세계경제가 전체적으로 얼어붙어 있는 상황이지만 이러한 불경기에 아랑곳하지 않는 분야가 바로 미술경매인 것을 보면 미술로 인한 그 경제적 산실은 국가적, 세계적으로도 어마어마한 수치가 된다. 이것이 바로 창조경제가 아닌가. 지금까지도 미국은 다양성과 개방성을 토대로 개인적 표현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그들의 창조성을 끌어내고 있다. 미술을 산업적 가치로까지 창조해낸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구속받지 않는 개인적 표현을 통해 자유가 가장 잘 전달된다.”

우리나라의 미술계의 현실은 어떠할까. 문화예술의 파급효과는 다들 인정하기에 K팝이나 게임 산업을 적극 지지하는 것이리라. 그 일시적 화려함 뒤로 우리 미술은 세계의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독일의 경제잡지 캐피탈이 지난해 11월에 발표한 생존 작가 중 세계 100대 작가를 보면 미국의 부르스 나우만이 1위, 독일의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2위를 차지했다. 3위엔 미국의 존 발데사리, 4위엔 미국의 신디 셔먼, 5위엔 미국의 에드루샤가 이름을 올렸다. 아시아출신 작가로 일본작가 3명, 태국작가가 1명이 100위안에 들었다. 세계 100대 작가에 한국 작가는 단 한 명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교육 환경의 차이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세계적 흐름에 맞게 우리나라 교육계에서도 사고력, 창의력, 주도성을 강조한 지 오래되었고, 교육정책이 그에 맞게 계속 바뀌고 있다. 또한, 정책이 바뀔 때마다 사교육상품들은 쏟아져 나온다. 그럼에도, 근본적 문제인 입시경쟁으로 인해 그 바탕은 쉽게 변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반복적 학습, 주입식교육으로 학업성취는 높다지만 사고력, 창의력, 주도성은 세계적으로 매우 낮은 수준이라고 한다.

세계적인 미술가가 탄생하지 못하는 이유, 학생들이 창의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주도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종국에는 같은 것이다. 다양성, 개방성,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 교육환경에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삶의 년 수 동안 세상은 빠르게 변화해서 불가능하게만 생각되었던 것들이 내 눈앞에, 내 손안에 쥐어져 있다. 그러나 아침 교문 앞의 풍경만은 시계가 멈춘 듯하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머리모양에, 박음질한 이름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다녀야하며, 개인의 종교와 상관없이 학교의 종교를 강요받아야하는 것이 여전한 2013년도의 학생이라는 이름의 현실이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다름’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로 학생들에게 통제하기 편리하도록 생활은 획일적으로 똑같이 하되, 사고는 창의적이고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들 학생에게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조건 없는 준법이나 부당한 규칙을 따라야 한다며 사소한 권리까지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이 타당할까.

미술을 업으로 삼고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필자의 눈에 예술적 강대국은 하나같이 개성이 넘쳐보였고, 학생이라고 하여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유연한 사고와 자기 표현력은 어른인 나로서도 부러운 것이었다. 그렇게 자유로운 학생들의 선생님이라면 교권이 무너져있을까. 아니다. 교사의 권위와 학생의 인권은 철저하게 다른 개념이다. 교사들도 실제로 교권을 침해하는 주체로 교사신분을 관할하는 교과부, 교육청, 학교관리자 등을 꼽는다. 학생과 교사의 관계를 정치적인 대립상황으로 만들어봐야 나아질 것이 전혀 없다. 학생이건 교사건 자신의 인권을 보장받은 사람들이 타인의 인권을 함부로 침해하지 않는다. 소모적인 논쟁을 그만 끝내고 창조적 가치관의 세계로 나아가야한다.

현 정부가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는 창조경제는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이를 기반으로 미래 성장 동력을 찾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정책이다. 그와 관련하여 이스라엘의 후츠파정신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후츠파’는 희랍어로 ‘순종적이지 못한, 어른들에게 말대답하는, 대담한’이라는 부정적 의미와 ‘책임감이 강한, 자기 운명에 책임을 지는, 항상 더 나은 결과를 지향하는’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동시에 지닌 단어이다. 정책 속 의미와 현실은 이 얼마나 괴리감이 있는가. 우리나라 학생인권은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의 권고를 수차례 받을 정도로 국제적 우려의 대상이라 한다. 참으로 창피한 일이다. 우리 아이들은 일제와 군사문화의 잔재를 물려받지 않고, 우리의 유년보다 자유롭고 행복하도록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해줘야 한다. 우리의 자녀가 민주사회의 작은 시민으로서 창조적인 사고를 하며, 주도적으로 삶의 계단을 오르며, 자신이 결정한 일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세계적 인재로 성장하기를 뜨겁게 바란다.

엄혁용<조각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