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영화제와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수정
전주 영화제와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수정
  • 김승연
  • 승인 2013.04.23 17: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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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영화를 참 좋아한다. 이유는 어렸을 때의 첫 꿈이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초등학교 운동장에 들어온 가설극장의 무성영화부터 시작하여 단 한 편도 빠뜨리지 않고 다 보았다. 어디 그 뿐인가? 신학교 다닐 때에도 중간시험, 기말 시험이 끝나면 곧바로 동시상영 극장에 가서 머리를 식히곤 했다. 대전에서 강도사(준목사) 고시를 본 후에도 곧바로 극장에 가서 중국 소림사를 배경으로 한 이소룡 영화를 보았을 정도이다. 미국에 가서도 할리우드의 영화 몇 편을 감상했다. 그래서 지금도 관객 천만 명을 돌파하는 영화는 빼놓지 않고 보고 있다. 아마 목사가 안 되었으면 영화배우나 탤런트가 되어 스크린에, 브라운관에 출현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전주에 살고 있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산 영화제도 있지만, 특별히 전주 영화제가 독일의 베를린 영화제나 불란서의 칸느 영화제, 이태리의 베니스 영화제 같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심정으로 이글을 쓰고 있는데, 신문을 보니 5월 9일 제14회 전주영화제 개막식 표가 예매 6분 26초 만에 매진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발전하려면 정명훈 같은 국제적인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나와야 하듯이, 한국 영화가 발전하려면 아카데미 부문에서 15개 이상의 상을 휩쓸만한 감독이 나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영화감독 하면 단연 유대인계 미국인 스티븐 스필버그를 소개하고자 한다.

스필버그는 어렸을 때부터 영화감독이 되는 꿈을 꾸었다. 그는 소년시절 구식 카메라를 들고 여동생을 주인공으로 아마추어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학생시절 스필버그의 아버지는 전기 기사였는데, 연달아 규모가 큰 회사에서 관리직을 맡게 되었기에 스필버그에게는 모처럼 친구가 생겼어도 얼마 안 있어 또 다시 다른 도시로 이사할 수밖에 없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다가 그의 가족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아주 가까운 캘리포니아의 사라토가로 옮겨갔다.

스필버그가 새로 전학 간 고등학교에는 유대인이라고는 스필버그 한 명 뿐이었다. 그 무렵 미국에서는 유대인이라면 이질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때문에 동급생들이 그를 왕따 시키는 것은 기본이고, 복도를 지나면 일부러 들으라고 빈정대기도 했다. 또 가서 때리거나 머리를 분수대에 처박거나, 얼굴에 흙을 이겨 바르거나, 짓궂게 괴롭히는 일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스필버그는 그 때마다 자기를 괴롭히는 상대방을 때릴 수 없다면 차라리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면서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 즈음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있던 스필버그는 학창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학생에게 주인공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카메라는 자신을 표현하는 것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스필버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지금의 명문 UCLA 대학교 전신인 캘리포니아에 있는 로스앤젤레스 대학에 입학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마추어 영화제작자인 그는 캘리포니아 주립 롱비치대학교에 입학했고, 재학 중 독학으로 영화 3편을 찍었다. 그 중의 하나가 10일에 걸쳐, 제작비 1만5천 달러를 투자하여 만든 22분짜리 무성영화 “앰블린”이다. 스필버그는 영화에 미쳤다. 한 번은 유명한 유니버설 스튜디오 투어에 참가했다. 노면 전차가 스튜디오 전체를 빙빙 돌면서 설명을 하는데, 스필버그는 도중에 살짝 내려 스튜디오 내부를 샅샅이 살피기 위해 투어가 끝날 때까지 음향 스튜디오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방학 3개월 동안 매일같이 스튜디오에 출근했다. 스필버그는 외부인인 것을 감추기 위해 양복을 말쑥하게 빼입고, 정문 수위실을 통과할 때는 천연덕스럽게 손을 흔들며 수위 아저씨께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 수위는 아르바이트생으로 착각하여 통과시켜 주었다. 스필버그는 스튜디오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유명한 감독, 작가, 편집자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사용하지 않는 사무실이 있으면 빌딩 안내판에 자기 이름을 내걸고 무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지내는 동안 스필버그에게 아주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그 당시 텔레비전 부분 제작부장을 맡고 있는 샤인버그에게 “앰블린”을 보여주었더니 감명을 받고 스튜디오와 계약 제의를 받은 것이다. 부장은 아직 대학생이었던 자신에게 질문했다. “자네는 대학을 졸업하고 싶은가, 아니면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가?” 이 질문을 받은 스필버그는 일주일 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계약 제의에 응했다. 입사한 스필버그는 3년 동안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감독하는 일을 했으나 역시 그의 꿈은 텔레비전보다 영화 제작에 있었다. 결국 1974년 “슈거랜드 특급열차”를 감독했으나 좋은 평가를 얻지 못했다, 그 유명한 “조스”라는 영화를 통해 대단한 인기를 얻는 감독으로 등장하면서 흥행 1위 기록을 갱신했고, “조스”로 벌어들인 수입으로 “E.T”로 흥행 1위를 고수하다 “쥐라기 공원”으로 흥행 수입 총 8억 5천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그 이후 그는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평소에 만들고 싶었던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감독하면서 독일 나치의 만행을 만 천하에 고발하여 공감대를 얻어냈다. 필자도 독일에서 “쉰들러 리스트”를 두 번이나 보았는데, 그 때마다 독일인들의 한숨 쉬는 절규를 들을 수 있었고, 상영 중 영화관을 박차고 나가는 것을 목격했으며, 영화가 끝나자 관람객 모두의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리고 스필버그는 근래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기인 “The Passion”을 만들어 “벤허”와 “왕 중 왕” 이후 전 세계 기독교인은 물론, 비기독교 인들에게까지 전도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이제 우리나라도 스필버그 같은 감독이 나타나 아직도 미제 사건인 일제의 만행과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 만천하에 고발하는 날이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속히 왔으면 한다.

김승연 <전주서문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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