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노도의 뿌리 깊은 상처, 학교폭력
질풍노도의 뿌리 깊은 상처, 학교폭력
  • 이승우
  • 승인 2013.03.21 21: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질풍노도와 같은 격정의 시기 청소년들의 푸른 꿈이 멍들어 가고 있다. 학교가 울고 있다. 잔인하게도 깊이 박혀 있는 상처의 뿌리처럼 학교폭력이 뼛속까지 아리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도려내고 긁어내 보려고 하지만, 골수까지 퍼진 아픔은 치유할 길이 없어 보인다.

이제 학교폭력은 학교와 사회적 일탈의 문제를 넘어서서 우리사회의 4대 사회악(社會惡)의 하나로서 국가의 문제가 되었다. 대통령이 근절 대책을 말하고, 범국가적 차원에서 대책에 대한 본질적인 재검토가 시작되고 있다. 악(惡)을 선도하고 계몽해야할 학교가 폭력의 사회악이 조장되고 양산되는 본거지가 되는 학교 아노미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학교의 교육이 학교폭력의 현상에 의해 주객이 전도된다면 이제 교육은 무의미해 지며, 학교는 설자리가 없어진다. 우리의 백년의 미래가 답답하기만 하다.

학교폭력에 대한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예방책과 우후죽순(雨後竹筍)의 대책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그 실효성이 일시적이고 단기적인 미봉책에만 이를 뿐, 학교폭력이 근본적으로 근절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사회의 교육에 대한 인식의 모순에서 기인한다.

그동안 성장제일의 국가 중흥정책을 성공으로 이끈 배경에는 교육이 기여한 바가 크다. 그러나 지난 60년 넘게 근대화의 성장을 주도했던 교육의 덕분에,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최고를 지향하는 경쟁적이고 획일적인 교육이 좋은 교육으로 인식되어 버렸다. 학교는 서열화 되고, 상위로 서열화 된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오직 진학과 입시만을 위한 교육이 되어, 학생들은 가열 찬 투쟁으로 경쟁의 일선에서 밤늦도록 새벽까지 과외로 학원으로 내몰려야 한다. 상위등급을 쟁취한 학생과 그 학부모는 교육적 상위계층으로 인식되며, 하위 등급에 머문 학생과 그 학부모는 교육의 하위계층으로 분류된다. 교육적 성취과정의 이러한 계층적 구분의 인식으로 인해 우월감과 박탈감의 갈등구조가 학교에서 비롯되어 사회전반의 통념적 인식으로 만연되어온 세월이 60년을 넘긴 것이다. 이처럼 누적되어온 경쟁 일변도의 획일적 교육의 결과는 질풍노도 청소년기의 공격적 성향을 폭력으로 표출하게 하였다. 서로에 대한 우월감의 지배욕과 박탈감에 대한 반대급부의 보상심리는 가학적인 학교폭력의 유형으로 나타난 것이다. 학교폭력의 저변에는 오직 경쟁에서 이겨야한다는 나만의 욕심이 있을 뿐,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은 실종되어 있다.

학생들의 폭력적 공격성이 동료 학생에 대한 사랑과 존중의 열정으로, 더 나아가 창조적 열정으로 바뀔 수 있도록 가르치고 길러진다면, 거기에는 학교폭력이 설 자리가 없게 된다. 사람을 배려하는 어진(仁) 인성과 열정에 대한 관심으로서 창조성이 온전하게 발휘되기 위해서는 인성함양의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고, 입시경쟁 위주의 교육보다는 창조성 함양의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통해 학교폭력의 깊은 상처가 치유되기를 바란다.

<이승우(군장대학교 총장, 전북교총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