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힘
詩의 힘
  • 이동희
  • 승인 2013.03.14 17: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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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곧 언어활동이다. 말을 사용하지 않는 인간의 영역은 없다. 세상사 인간의 활동이 모두 언어로 의역되지만 말을 도구로 사용하느냐, 아니면 말 그 자체를 부리느냐에 따라서 두 가지로 대별된다. 후자를 대표하는 유일한 영역이 시-문학이고, 시를 제외한 모든 인간의 영역은 말을 도구로 사용하는 전자에 해당한다.

시-문학에도 언어의 의미(이성)적 요소가 작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형식(감성)적 요소가 시-문학의 핵심이라는 점이 다르다. 이점은 칸트도 이미 지적한 바가 있다. “예술창작 및 예술감상이라는 놀이에서 상상력과 오성 두 능력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기분이 좋아진다. 더불어 이때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때의 아름다움은 형식미다. 다시 말해서 대상의 질료적·경험적 내용미가 아닌 것이다.”(최인숙『칸트』살림.50쪽)

여기서 ‘형식미(形式美)’란 우리의 주관적 능력(상상력+오성)이 어떤 대상을 계기로 해서 느끼게 되는 미다. 형식미는 그 대상에 대한 지식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활동에 연유한다. 물론 이러한 활동이 발생하는 데에는 대상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대상은 우리 마음을 자극하는 계기가 될 뿐, 아름다움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시문학의 언어는 그 언어로 표현된 대상에 대한 환구나 재구가 아니다. 언어 자체를 대상으로 하여 촉발되는 시는 쓰고 읽는 이의 마음그림이다. 그래서 세상에 똑같은 형식의 시는 존재할 수 없다. 시인들은 시마다 새로운 형식을 창조함으로써 언어의 의미망으로부터 일탈하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존재이고, 그 결과가 곧 시-문학작품이다.

한 편의 시가 지니는 형식적 완결성은 작품마다 차별화된 특성이 있다. 시들이 갖춘 형식성은 여러 시적 요소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형식미는 별개의 특성을 띠게 된다.

이를테면 어떤 시는 질문의 형식을 띠기도 한다. 시어 자체가 질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신은 누구인가? 끊임없이 묻으면서 대답한다. (시「I am YHWH」부분) 야훼라는 히브리어의 ‘지금 있는 자’라는 뜻으로서가 아니라, 시가 드러내는 독특한 형식미가 읽는 이의 마음에 신의 현존성에 대한 울림을 준다.

또한, 시의 형식미는 사람됨의 핵심인 말을 찾는 행위로 나타나기도 한다. <솟구치는 말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의 생생함으로/ 사전에서 훔쳐 일상적인 단어를 골랐다/ 열심히 고민하고, 따져보고, 헤아려보지만/ 그 어느 것도 절절치 못하다.>(W.쉼보르스카「단어를 찾아서」6연 중 첫연) 이때의 ‘단어’는 뜻의 말이 아니라 사람됨을 이룩해낼 진정성의 어떤 형식미이다. 사전적 의미를 뛰어넘는 형식미의 창조가 곧 시다.

어떤 시는 고정관념-편견으로 물든 색안경을 벗기는 형식을 취한다. <나는 언제나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권하련다/나는 좋아한다. 사물이 노래하는 것을/너희들이 사물을 만지면 곧 굳어버린다/너희들은 저마다 그것을 죽이고 있다.>(릴케「제목 없는 시」 전체 3연 중 셋째 연) 릴케가 지적하는 것은 편견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다. 그것마저도 언어의 질료가 주는 의미가 아니라, 독자의 심미안으로 구축되는 시적 은유 형식이 주는 아름다움일 뿐이다.

결국, 시는 부드러운 힘을 드러내는 형식미다. 현실적 삶의 언어는 확신에 차 있고, 큰 말을 좋아하며, 닫힌 말, 불의 말을 선호한다. 그러나 시의 언어는 회의적이고, 작으며, 열린 물, 물의 말을 선호한다.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W.쉼보르스카「두 번은 없다」전체 7연 중 제6연) 사라지는 존재, 그래서 아름다운 존재라는 말은 질료적·경험적 내용미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쉼보르스카의 언어적 형식-시의 형식미가 주는 부드럽고 유약한 힘이 주는 감동이다. ‘존재→사라짐→아름다움’으로 이어지는 시적 형식성은 은유와 결부되어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 유연하지만 오달진 아름다움이다.

시의 부드러움이 강력한 힘을 이길 수 있다. ‘天下柔弱莫於水 而攻堅强者 莫之能勝’(천하유약막어수 이공견강자 막지능승-도덕경 78장) 세상에 물처럼 약하고 부드러운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굳세고 강한 것을 치는 데 물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노자의 선견지명은 시의 힘, 시의 형식미를 말하는 것 같다.

이동희<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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