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러
오일러
  • 김인수
  • 승인 2013.03.14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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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근대 수학사에 있어 그 기본 체계의 가장 많은 부분이 오일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늘날 수학책에서 쓰이는 많은 기호는 오일러가 도입한 것인데, 수학에서 가장 유명한 기호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 문자 π를 지름(직경)에 대한 원주율(2πr)로 표시하여 공식화한 것이 바로 오일러였다. 오일러가 이 π와 관련하여 공식을 유도하고 완성한 분량은 작은 한 트럭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일러의 천재 수학자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극히 작은 일부분일 뿐이었다.

레온하르트 오일러(Leonhard Euler, 1707.4.15~1783.9.18)는 스위스의 바젤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수학적 안목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마추어 수학자였던 아버지에 의해 싹튼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버지 파울 오일러는 칼뱅파 목사였다. 13세가 되던 해(1720) 오일러는 아버지와 본인의 의사에 따라 유명한 바젤대학에 입학하여 목회자가 되기 위한 신학을 공부한다. 그러나 오일러는 곧바로 자신의 사명이 신학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통해 흥미를 가지고 있던 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의 수학적 재능은 일찌감치 동향의 유명한 수학자 베르누이의 눈에 띄었고, 그는 약관 20세에 러시아의 성 페테르부르그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23세가 되던 1730년에는 페테르스부르그 대학의 물리학 교수, 26세인 1733년에는 다니엘 베르누이의 후임으로 수학과 주임을 맡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그저 그는 단순히 뛰어난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오일러는 누구보다도 역경을 신앙으로 극복하며 과학자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었다. 오일러가 소년기에 받았던 신앙 교육은 그의 평생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칼뱅파 신앙을 조금도 버리지 않았으며, 나이가 들면서는 아버지의 천직으로 되돌아가 전 가족을 위한 기도회를 주관하고 설교를 정규적으로 하던, 어느 면에서는 목회자나 다름없었다. 콩도르세라는 사람이 쓴 「찬사」라는 책에 보면 “오일러는 사는 것과 계산하는 것을 함께 멈추었다”고 말하여, 그의 평생 삶이 얼마나 수학과 함께하였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이런 모든 과학적 열매들이 어떻게 우연하게 스위스의 이 한 과학자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을까? 어쩌면 오일러의 수학적 발견들은 그가 아니었더라도 훗날 누군가가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신학을 원하던 이 칼뱅파 목사의 아들을 오히려 위대한 수학자로 선택하였던 것이다.

오일러는 28세 때 그는 한쪽 눈을 잃게 된다. 그리고 1766년에는 다른 하나의 눈마저 잃게 되었다. 그는 또한 13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8자녀를 어려서 잃는 비운을 맞보기도 했다. 이런 고난 가운데서도 그가 현대 수학사에 있어 가장 뛰어난 금자탑을 이루었다는 것은, 한때 신학을 공부했을 만큼 독실한 칼뱅주의자였기에 고난을 신앙을 통한 불굴의 의지와 인내로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특히 수학의 미적분학, 미분방정식, 무한급수, 해석기하학 등에 흥미를 갖고 많은 공헌을 남겼다. 그가 남긴 뛰어난 업적은 일반인들은 쉽게 접근하기 쉽지 않을 만큼 대단히 전문적이고 난해하다. 역학에 있어서의 오일러-라그랑주의 방정식, 무한급수에 있어서의 오일러의 변환, 오일러의 정수, 오일러 증명, 오일러 적분, 오일러의 수, 강체 운동에 있어서의 오일러의 각, 오일러의 방정식, 오일러의 공식, 오일러의 동차함수의 정리, 탄성이론에 있어서의 베르누이-오일러 법칙 등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그 내용은 기억나지 않더라도 언젠가 한두 개 정도는 귀에 익은 법칙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었음에도 그는 천부적인 기억력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가 수학자로서 연구를 시작한 때는 뉴턴이 사망한 시기에 해당한다. 해석기하학·미적분학의 개념은 갖추어져 있었으나 조직적 연구는 초보단계로, 특히 역학·기하학의 분야는 충분한 체계가 서 있지 않았다. 그는 미적분학을 발전시켜 《무한해석 개론 Introduction in Analysis Infinitorum》(1748) 《미분학 원리 Institutiones Calculi Differontial》(1755) 《적분학 원리 Institutiones Calculi Integrelis》(1768∼1770), 변분학(變分學:극대 또는 극소의 성질을 가진 곡선을 발견하는 방법)을 창시하여 역학을 해석적으로 풀이하였다. 이 밖에도 대수학, 정수론, 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큰 업적을 남겼다. 삼각함수의 생략기호(sin, cos, tan)의 창안도 그의 공헌이었다. 베를린 시대에 프리드리히대왕의 질녀에게 자연과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쓴 《독일 왕녀에게 보내는 편지》는 당시 계몽서로 유명하였으며 7개 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사실 그의 관심은 수학이 적용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 미치었다. 18세기에 이미 그는 빛의 파동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천문학에 있어서도 상당한 수학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32권의 책을 저술하는가 하면 75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할 만큼 오일러는 고난 가운데서도 수학적 통찰력이 끊임없이 분출된 과학자였다. 최근 그의 조국 스위스는 오일러가 남긴 책과 논문과 연구 자료는 현대 중형 트럭으로 두 대 분량에 달했다고 발표하여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이학박사, 전북대학교자연과학대학 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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