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지기 <520>가던 날이 장날이었구만
가루지기 <520>가던 날이 장날이었구만
  • 최정주 글,고현정 그림
  • 승인 2013.02.20 15: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9 상견례 <91>

“웬 한숨이여? 조선비허고 잘 안 될 것 같은가? 맴쓰지 말게. 그 양반헌테 꼭 보개피럴 허고 싶은 맴도 없응깨. 상놈이 양반헌테 어디 한 두번 얻어맞든가? 죽도록 맞아도 어디 하소헐 디도 없는 것이 상놈의 팔자가 아니든가?”

“먼 말씸이요? 한번 칼얼 뺐으면 허다못해 무시쪼가리라도 짤라야제요. 뒷간에서 일 보고 밑 안 딱은 것 맨키로 껄쩍지근해서 안 되요.”

“힘들겄담서? 그래서 오널도 그냥 온 것이 아니냐고? 그런 일일수록 사내가 몸이 닳아 보채야허는디, 임자가 보채야 쓰겄는갑만.”

“보채기넌 내가 멋 땜시 보챈다요? 사내라면 서방님 하나로도 족허요.”

“헌디, 왜?”

“오널 일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요. 내가 마천 주막에 간깨, 조선비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들이당착에 그 양반이 돈전대럴 내보임서 은근히 돈냄새럴 풍깁디다. 사내가 그럴수록에 이쪽에서넌 돈에 무심한 체 해야쓰거든요. 그래서 내가 그랬제요. 돈냄새 풍기지 말고 술이나 한 잔 허자고요. 주모 아짐씨가 와서 숨넘어가는 소리럴 허길래 왔제만, 내가 그리 호락호락헌 년이 아니요, 했제요.”

“그랬는디?”

“거창헌 술판이 벌어졌제요. 내가 마천주모럴 도울 일이 머가 있겄소? 꽃값얼 나놔주겄소? 그렇다고 설거지럴 해주겄소? 어뜨케던 조선비의 전대를 풀어 안주나 기름지고 넉넉허게 맹글아야 주모가 떡고물이라도 얻어묵제요.”

“임자넌 낭중에 극락에 갈 것이구만. 넘 생각얼 그리헌깨.”

강쇠 놈의 능청에 옹녀 년이 생긋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극락이라면 서방님이 보내주는 걸로도 넘쳐서 흘르요. 더 이상 다른 극락은 욕심없소. 암튼지간에 술상 한번 걸게 봐가지고 부어라 마셔라, 술얼 마셨는디, 가끔은 조선비의 애간장도 ?임서 술얼 마시고, 조선비헌테 돈 서른냥얼 받기로 허고 치매럴 벗을라고 허는디, 그 집 하인이 왔습디다. 조선비네 부친이 칙간길에 쓰러졌다고요.”

“흐참, 가던 날이 장날이었구만. 해필이먼 오널 쓰러질 것이 머당가? 임자 일진이 안 좋았는갑만. 주모헌테 존 일만 시켰구만.”

“혼자 술얼 홀짝거리고 있는디, 먼 일인가허고 나갔던 주모가 와서 허는 말이 조선비네 집에 초상이 났다고 그럽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